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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 변승우 (사도나다나엘 /2009.12.05)

2016.07.12 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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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언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고린도전서 14:1-5)

2002년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빌 해몬 박사의 컨퍼런스에 참석했을 때 박덕근 목사님의 사모님이 제게
“너희 교회는 예언하는 교회가 되리라”라고 예언했습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참으로 황당한
예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 수도 얼마 되지 않았지만, 교회 내에 예언은 커녕 환상을 보는 사람조차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수년이 지난 지금 우리 교회는 그 예언대로 정말로 예언하는 교회가 되어 있습니다. 지성전을
포함하면 현재 모두 12개의 예언팀이 가동 중이며 서울, 울산, 부산 등지에서 선지자학교를 하고 있는데
참석 인원이 500명을 넘어섰습니다. 그리고 환상을 보고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예언하는 사람들이
교회 내에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미 아시는 분이 많겠지만 예언에는 크게 세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로, 예언의 영입니다.

계 19:10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

이처럼 성령님은 예언의 영입니다. 예언의 영은 구약의 선지자들에게만 임했던 성령이 신약의 모든
신자들 안에 거하시므로 모든 신자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예언의 영이 나타날 때 믿음으로 행하면
누구나 예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말이 아니라 예언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예언과 마찬가지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가장 초보적인
형태의 예언입니다. 그래서 신디 제이콥스는 이것을 “기초 예언의 은사”라고 불렀습니다.

둘째로, 예언의 은사입니다.

고전 12:10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예언의 은사는 간헐적인 것이 아니고 그 사람 안에 거주합니다. 그래서 항상 예언할 수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자주 빈번하게 예언할 수 있게 됩니다. 이 단계에서 예언하는 사람들은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고전 14:3). 이런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예언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성경에서 말하는 선지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예언의 은사와 선지자가 되는 것, 이 둘은 다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둘을 같은 것으로
혼동하지만 같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예언을 한다는 것이 그를 선지자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하게 누구든지 예언하기를 사모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고전 14:1).
그렇지만 예언하는 것이 여러분을 선지자로 만든다면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선지자가 되기를
사모하라고 말씀하셨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고전 12:29)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언의 은사를 받은 것과 선지자가 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셋째로, 선지자의 직임입니다.

고전 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선지자의 직임은 사람이 원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것입니다.

렘 1:5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이처럼 하나님이 만세 전에 선지자로 선택한 일단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선지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선지자로 기름 부음을 받았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보통 예언의 은사에서는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안위하는 예언을 많이 하고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예언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지자의 기름부음이 임하면 미래에 대해 예언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계시의 은사 즉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과 영들 분별함의 은사가 모두 나타납니다.
이런 사람이 선지자입니다.
한편,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선지자로 선택하셨고 선지자들에게 주어지는 계시적인 은사들이 부어졌어도
대부분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이것이 성경 안에 선지자학교 혹은 선지자 생도가 있는 이유입니다.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사람은 선지자로서 훈련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래야 숙련된 선지자로서
실수하지 않고 교회에 덕을 끼치며 주의 일을 잘 수행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훈련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착각하고 있습니다.
즉 ‘세상일과 달리 예언 사역은 은사를 받으면 되고 훈련은 필요 없다’는 사상이 퍼져 있습니다.
그냥 예언의 은사를 강하게 받으면 그것으로 족하고 그러면 선지자가 되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그 증거로, 가장 규모가 큰 예언 단체인 C. I 본부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탐 해몬 목사님은 “지혜와 계시의 영”이라는 주제의 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에서 훈련이 필요한 어떤 사역을 꼽는다면, 그것은 바로 예언 사역이다.
예언은 그리스도의 몸에 유익과 축복을 끼치는 가장 강력한 도구지만, 동시에 교회에서 가장 커다란
잠재적인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철없는 아이 수중에 들린 칼은 아주 쉽게 몸을 베거나
상처를 입히지만, 똑같은 칼이 의사의 손에 들려 있으면 수술을 통해 치료를 가능하게 만든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언이라는 은사에는 이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의 기술, 훈련, 준비, 의중에 따라
교회를 세우거나 파괴시키는 놀라운 잠재력이 내포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구약성경에서 예언자의
아들들이 사무엘과 엘리야에게 그토록 부지런히 제자 훈련을 받아야 했던 이유이다.”

예언의 은사가 강하게 임한 사람들에게 곧잘 달라붙는 것이 ‘무당의 영’입니다. 무당의 영은 교만과
탐심의 구멍으로 들어오며, 무당의 인격과 특성을 강화시킵니다. 그래서 꼭 무당처럼 무례하게 말하고
거칠게 행동하게 합니다. 우리는 무당의 영을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습니다.

“무당의 영은 성령의 은사를 받았으나 그 은사를 무당의 인격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무당의 영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성령께로부터 온 은사를 받았다고
다 된 것이 아닙니다. 바른 영 즉 바른 정신으로 성령의 은사를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그동안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많은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상당수의 목회자들이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을 경계합니다. 이것은 은사를 받았으나
권위 아래 거하며 충분히 훈련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어찌 보면 그들도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피해자들입니다. 그들이 잘못된 책임의
일정부분은 목회자들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영적으로 잘 지도해주기보다는 목회자들이
종교적이 되어 무조건 경계하고 배척했기 때문입니다.
이상과 같이 예언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소개하는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들어 계속 정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2005년 11월 22일 릭 조이너는 우리나라에 대해
다음과 같은 아주 중요한 예언을 했습니다.

“한국은 장차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단은
핵무기 파괴 등을 통해 남한을 붕괴시키려는 의도를 품고 있는 것이다.
곧 북한에 놀라운 변화의 문들이 열리게 될 것이다. 두 개의 분단된 국가가 재 연합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이고, 그때 한국은 영적인 면에서나 경제적인 면에서 지구상의 국가들 중 가장 강력한 국가들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이것은 또한 동북아시아의 경제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강력한 지역이 되는데
도움을 주게 될 것이며 경제적으로도 일본과 독일을 뛰어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큰 혼돈들
가운데에 열방에 안정된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게 될 것이다…
한국인들은 권위에 대해 두드러진 존경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무법이 성행하는 때에도 열방에
빛을 비출 수 있게 될 것이다… 한국에서 일어나게 될 청년 운동은 마지막 시대에 위대한 크리스천
지도자들을 길러내게 될 것이다… 앞으로 신뢰할만한 선지자들이 한국교회에서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비전을 심어주고, 그것을 붙잡고 나아가는 것을 도와주게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자칭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이 많으나 “신뢰할만한 선지자”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그것도 대부분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 있는 사람들이고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받은 은사, 체험, 성령의 기름 부음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1천척 혹은 2천척에서 머무르지 말고 계속 성령의 강물의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십시오.
그래서 여러분들 속에서 릭 조이너가 예언한 “신뢰할만한 선지자들”이 일어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1. 예언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빈번해질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학생회장을 했던 교회가 기억납니다. 당시 담임목사님은 나이가 많으셨던 분인데
그분은 예언 혹은 계시라는 말만 나오면 몸을 파르르 떨었습니다. 왜냐하면 계시는 성경으로 끝났다고
믿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계시가 정말 끝이 났습니까? 그러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뿐만 아니라 바울은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고후 4:3-4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여기서 가리우는 것의 반대가 바로 계시입니다. 복음을 전해들은 사람이 다 구원을 받습니까? 아닙니다.
계시를 받은 사람만이 회개할 수 있고, 믿을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행 26:17).
그리고 그 계시는 예수께서 제자들에 대해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감사하셨던 것처럼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겸손한 자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만한 사람은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하박국 2:4 말씀에도 암시되어 있고 다음 성구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고후 10:3-5절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예수님 역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마 18:1-4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이것은 천국에서 누가 큰 자가 될 것인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구원의 조건을 보여주고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3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4절에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어린아이들과 같이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따라서 교만한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교만한 자는 말씀을 들어도 믿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자는 자기 죄를 회개하기보다는 목회자의 설교를 폄론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에 나오지만
믿음이 없는, 그리고 교회에 나오지 않는 불신 남편들의 특징 아닙니까? 정확하게 이것이 그분들의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교만을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주의 종들 앞에서
마음을 낮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들어가고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계시는 오늘날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왜 많은 목사님들과 성도들이 계시 혹은 예언 소리만
나오면 기겁을 하고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요? 그것은 성경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고전 13:8-10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곡해함으로써 성경의 완성과 더불어 예언을 비롯한 성령의 은사들이 중단되었다는
그릇된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성령의 은사들이 성경의 완성과 함께 끝났다는 것을
보여주기는커녕 도리어 성령의 은사들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지속될 것을 보여줍니다.
12절까지 문맥에 주의하여 성경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바울은 예언과 방언들과 지식이 그칠 때가 있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했습니다. 성령의 은사들이 그칠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성경이 완성된 때가 아닙니다.
그러면 그때는 언제일까요?
고린도전서 13:8-12절을 통해서 우리는 그때가
① “장성한 사람이 될 때(완전함에 이를 때)”,
②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때”,
③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하게 알 때”(10, 12절)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성경이 완성된 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하실 때에 이루어질 일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온전한 것'(10절)이 성경의 완성을 언급한다고 주장합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이 쓰여졌을 때, 교회는 완전한 성경을 가졌고, 더 이상 기적적인 성령의 은사들은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그에 반대하는 확고한 논의들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것을 소개해드리면,
첫째로, 인접한 문맥의 어디에서도 바울은 성경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둘째로,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뵙고 있다고
말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아시는 것처럼 우리가 완전히 안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셋째로, 12절에 나오는 표현은 교회나 성경의 완성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미할 경우에만
사용 가능한 표현입니다.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12절)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주께서 아시는 것만큼 내가 온전히 알리라”(12절)는
말 역시 주님의 다시 오실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들이
주님처럼 전지해질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오보나 오해 없이 정확하게 알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것이 올 때” 즉 예언을 위시해서 여러 가지 은사들이 끝나는 때는 성경의 완성의 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흔히 은사가 끝났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이 구절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교회 안에서 성령의 은사들이 계속 작동할 것이며
지속될 것임을 오히려 입증해주는 구절인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들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바울이
고린도교회 사람들에게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전 1:7)라고 말했을 때 이것을 염두에 두었는지도 모릅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성령의 은사들을 예수님의 재림과 연결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성령의
은사들이 계속 존재할 것임을 암시하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와는 달리 오늘날은 대부분 이 사실을 잘 압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언의 은사가 지금도
존재한다는 것을 마지못해 인정은 하지만 여전히 예언을 달가워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성경이 곧
예언이고 설교가 예언이다. 이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라고 반박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대로
예언의 은사가 필요하지 않다면 왜 하나님께서 성경에 예언의 은사에 관해서 말하고 있으며
특히 요엘은 마지막 때에 성령과 더불어 예언의 은사를 부어주겠다고 예언하고 있는 것일까요?
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이 설교가 곧 예언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그리고 성경과
설교만 있으면 되고 예언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데 그것도 올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월리스 해플린 2세는 “이제는 예언 사역 시대”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예언의 은사가 대단히 낯설다. 그래서 예언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몇몇 현대판 영어 성경 번역본에서 ‘예언'(prophecy)이라는 단어를 ‘설교’ (preaching)라고 번역하고 있다.
우선 설교는 예언이 아니라는 것부터 지적해야겠다. 설교가 본질상 예언의 요소를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설교 자체를 예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대개 다년간에 걸쳐서 경험하고 학습한 것을 가지고 설교한다. 반면에 예언은 우리가 과거에
경험하거나 배운 적이 없는 것을 미리 준비할 새도 없이 완전히 순간적으로 즉석에서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 예언할 때, 말하는 사람은 성령님이 감동하신 것만 전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예배 시간에 성경 본문을 읽거나 인용하면서 그것이 예언을 대체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예언일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계시의 기록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경 계시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에게 개별적으로 친히 말씀하길 원하시며
좀 더 자세하게 삶의 방향을 지시해주고 싶어 하신다. 하나님은 기록된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예언이라는 다른 방법을 통해서도 개별적으로 응답하신다.
예언과 기록된 성경 말씀은 서로 다른 것이므로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언은 성경말씀과 구분되는 것입니다. 예언은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사람을 통해
특정한 회중들에게 주어지는 특정한 말씀입니다. 반면에 성경말씀은 장소와 시간을 불문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과 예언 혹은 설교와 예언 중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둘 다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둘 다를 주신 것입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들께 매우 희망적이고 흥분되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성경의
완성과 함께 끝나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까지 교회 안에 존재할 것이며
도리어 그날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빈번해지게 될 것입니다.

욜 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이것은 이중 예언입니다. 처음으로 이 예언은 오순절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날 불과 15개국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요엘은 ‘만민’이 성령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는 주님이 말씀한
바로 그 마지막 때를 즈음하여 전 세계적으로 성취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때의 교회는
예언과 꿈과 환상의 증가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엘이 말한 대로 성령이 오시면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모세를 위해 시샘하는 여호수아에게 “여호와께서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저 역시 같은 심정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더 많은 성도들이 예언의 은사를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예언의 은사를 받을 수 있을까요?
저는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는 모든 분들에게 바울의 기도를 계속 반복해서 드리라고 권면하고 싶습니다.

엡 1:17-1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오래 전 유명한 선지자 케네스 해긴 목사님이 이 기도를 반복해서 드렸습니다. 그러자 환상의 세계가
열리고 예언적인 계시가 임했습니다. 선지자 짐 골도 처음부터 꿈을 꾸고 환상을 보고 예언을 하는 등
계시를 받게 되었던 것이 아니라 이 기도를 반복해서 드리기를 시작하면서 서서히 계시의 세계가
열렸다고 고백했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도 이 기도문을 따라 매일 기도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어느 날 드디어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모하는 마음으로 바울의 기도를 따라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을 부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예언의 은사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2. 예언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예언은 중요합니다.
‘초대 교회 이후로 성령의 이적적인 은사들이 중단되었다’고 가르치는 가장 대표적인 신학교는 미국에
있는 달라스신학대학입니다. 그런데 달라스신학대학의 구약학 조교수로 있었던 잭 디어는
“놀라운 하나님의 음성”, “놀라운 성령의 능력”, “놀라운 예언의 은사”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들은 그가 몸담고 있었던 신학교의 가르침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잭 디어도 그 학교의 다른 교수들처럼 성령의 은사가 지금은 사라졌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기적들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성경을 면밀하게 검토하고 연구해본 결과 그동안 자신이 알고 있던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패러다임의 전환을 경험했습니다. 그 후 그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용감하게
앞에서 말한 책들을 썼습니다.
감사한 것은 오늘날 잭 디어 교수가 체험한 것과 같은 패러다임의 전환을 경험하는 사람의 수가
놀랍도록 증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 수가 많다 못해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기정사실화 되자 마지못해 그것을 인정하기는 하나 거기에 적극 가담하지 않는
방관자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오늘날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예언이 현재도 존재함을 인정하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말합니다. 그리고 앵무새처럼 “말씀 말씀 말씀”을 되풀이합니다.
물론 말씀을 강조하는 것은 백 번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말씀만을 강조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알아야 하고 말씀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그러나 말씀 위에 서기 위해 예언을 멸시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바울은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했고, 또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특별히”라는 단어를 사용했음을 잊지 마십시오. 예언에는 특별한 가치가 있습니다.
예언은 특별히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언을 터부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예언은 왜 특별히 중요할까요? 여러 가지의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그중 한 가지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한 가지를 말하는 것만으로도 예언이 왜 중요한지를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언의 은사는 마치 영적인 자궁과 같은 은사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목적들을 분만시키고 현실 세계에서
성취되는 것을 돕습니다. 그리고 각 사람 속에 내재해있는 성령의 은사들을 활성화시키고 그 사람의
잠재력을 끌어내고 부르심을 성취하게 해줍니다. 그러니 예언이 중요합니까? 중요하지 않습니까?
중요하지요?
마 10: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데이브 듀엘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라는 책에서 이 말씀에 대해 매우 특이한 해석을
제공했습니다. 어느 7월 더운 날의 일입니다. 데이브 듀엘이 갈보리 인터내셔널에서 온 성령으로
불타오르는 선교사들과 그들의 친구들을 위해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위해 손을 얹고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에게 계시를 주셨습니다.

“데이브, 나의 말씀 중에서 ‘선지자를 선지자로서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받을 상을 받는다’고
내가 말한 의미를 알겠느냐? 선지자가 받는 상이란 무엇인지 너는 알고 싶으냐?”

“예, 주님 저는 알고 싶습니다. 선지자의 받을 상이란 무엇입니까?”

“선지자의 받을 상이란 그의 말이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너에게 말씀을 줄 때 너는 상을 받는
것이다. 선지자의 받을 상이란 선지자의 말을 의미한다.”

데이브 듀엘은 그의 책에서 선지자의 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자신이 경험한 몇 가지의 간증을 소개하였습니다.
한번은 제임스 위트콤 목사님이 인도하는 집회에 참석했는데 회중 가운데서 데이브를 불러내어
그가 왕과 여왕, 혹은 각 나라의 통치자 앞에 서게 되며, 전 세계를 여행하고 놀랄만한 위대한 기적이
행해지는 것을 보게 된다고 예언했습니다. 당시 데이브는 농부이며 목장주였습니다. 그 예언은 그로서는
믿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 나는
선지자의 말씀을 믿습니다. 나는 이 말씀이 성취될 것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은 지금 실제로 실현되고 있습니다.
또, 한번은 퍼즈 카페테리아에서 열렸던 순복음세계실업인회의 집회에 참석했는데 단 험프리즈 목사님이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사용하여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는 뒤편에 앉아 있었으며,
주위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조그마한 소리로 주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저에게도 저 은사를 주십시오. 지식의 말씀 은사를 꼭 받고 싶습니다.”

그때 돌연 단 목사님이 “뒤에 있는 당신!”하고 말하면서 그를 앞으로 불러내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지금 하나님께 성령의 은사를 구했지요?”

“예.”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구했군요.”

“그.. 그.. 그렇습니다!”

그러자 단 목사님은 데이브를 가리키면서 “당신의 것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했고, 다음 순간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덮쳤습니다. 그가 넘어졌을 때, 죽는 건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강하게 테이블에 머리를
부딪쳤습니다. 그리고 눈을 뜨고 겨우 테이블 아래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왔을 때, 그에게는
지식의 말씀의 은사가 주어져 있었습니다. 선지자가 그것을 그를 향해 풀어놓아 주었고 그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단단히 받아들인 것입니다.
또한, 언젠가 데이브는 케네스 해긴 목사님과 개인적으로 만나는 영광을 누린 적이 있습니다.
그는 그분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긴장으로 떨면서 물어보았습니다.

“해긴 목사님, 저를 위해 기도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 말을 듣고 그는 마음속으로 ‘아 이런, 부탁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하고 생각했습니다. 긴장으로
쓰러질 것처럼 되어 있던 그를 보고 케네스 해긴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위해 기도할 때가 오게 될 것입니다. 언젠가 당신을 위해 기도해드리기로 하죠.”
그 후 어느 날 오클라호마주 툴사에서 열렸던 ICFM대회에서 케네스 해긴 목사님이 메시지를 전하고
계셨습니다. 메시지 후, 해긴 목사님은 데이브와 그의 아내 보니 앞으로 왔습니다. 해긴 목사님은
두 사람을 통로에 세우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당신들을 위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고 있습니다. 당신들 두 사람은 커다란 비전과
꿈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하고 그 비전과 꿈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도 너희의 비전과 꿈을 웃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은 실현된다.’”

그 말씀을 들었을 때, 두 사람에게 능력이 흘러 들어왔으며 둘 다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그들은 하나님이 주셨던 비전과 꿈이 실현된다는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데이브 듀엘의 인생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 또 한 사람은 밥 레먼 목사님입니다.
그는 한 참 설교를 하던 중, 데이브를 향해 외쳤습니다.

“자 이 집회장 주위를 달리십시오.”

그는 기진맥진할 때까지 달렸습니다. 그리고 “왜 나는 달리는 겁니까?”하고 밥 목사님께 물어보았습니다.

“당신이 이 집회장을 돌았던 횟수만큼 당신은 세계를 순회하게 된다고 성령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힘을 내어 다시 집회장을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선지자의 말에는 순종해야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이때 주어졌던 말씀이 지금은 데이브 부부에게 실현되고 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이미 세계 60개국을 순회했으며, 더 많은 나라로 나아가려 하고 있습니다.
저도 선지자의 상을 경험한 일이 있습니다. 오래 전 전라도 광주에 갔을 때 저와 참석자들은 집회 시간마다
외국에서 온 강사 목사님의 기도를 받았는데, 특히 마지막 집회 때는 성령의 임재하심이 대단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강력한 기름부음이 임한 것을 분명하게 느꼈습니다. 그때 강사 목사님이 “여기 모인
모든 목사님들에게 예수님의 겉옷이 내려와 입혀지는 것이 보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실제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강사님의 요청에 의해 거기 모인 모든 목사님들이 성도들을 위해
안수하며 기도했는데 저도 기도할 때에 어떤 이는 쓰러지고 또 대단한 영적 현상들이 동반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음이 분명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어떤 여전도사님은 저에게로 달려와서
“목사님 저도 기도해 주세요”하고 손을 잡아끌고 가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런 역사가 그 집회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에 와서도 계속 이어진 것입니다.
집회를 다녀온 바로 다음 주 주일낮예배 후에 저는 늦게까지 남아있던 4사람에게 안수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4명 모두 넘어지고 그 중 한 분은 거룩한 웃음을 터뜨리며 강력한 성령 체험을 했습니다.
화요제자 훈련 모임 때는 더 강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권능에 의해
의자에 앉아 있다가 넘어지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고 진동을 하고 구역질을 하고
거룩한 웃음을 터뜨리고 그야말로 대단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금요기도회 때 다시 저는 성도들을
안수하며 기도했는데 안수 받은 사람이 성령의 능력으로 넘어지고 마음에 상처가 많은 어떤 집사님은
어린아이같이 울음을 터뜨리며 내적 치유를 받았으며 또 집사님 한 분은 난생 처음 성령의 강력한
만지심을 받고 완전히 대 자로 쭉 뻗었습니다. 그분은 계속해서 울고 때로는 거룩한 웃음을 터뜨리며
한 시간이 넘게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못하고 성령의 권능 아래 넘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집에 갈 때도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렸습니다. 나중에 전해들은 일인데 그 후 마치 아이를
임신하고 있다가 해산을 한 것처럼 속에 가득 있던 근심과 걱정이 다 빠져나가고 가볍고 시원해짐을
느꼈다고 합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저는 저 자신이 선지자의 상을 경험했을 뿐 아니라 저를 통해 다른 사람들이 선지자의 상을
경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울산 큰믿음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는 김선화 전도사님입니다.
당시 그분은 교회에 등록한 지 불과 2주 밖에 안 되는 새 신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날 저는 안수하면서
다음과 같이 예언했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내가 너를 만세 전부터 알았고 또 사랑하였고 택하였노라.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너는 너의 짐을 나에게 모두 맡겨라. 내가 너를 모든 문제로부터 구원할 것이다.
그리고 너는 나중 되었으나 먼저 될 자가 될 것이다. 너는 은혜를 받고 빠르게 신앙이 성장할 것이며
먼저 믿은 자들에게 신앙의 귀감이 될 것이다. 그래서 믿은 지 오래된 사람들이 너를 보고 말할 것이다.
‘예수를 갓 믿은 초신자도 저렇게 신앙생활을 하는데 우리는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이렇게 너는 먼저
믿은 자들에게 도전을 주고 일깨우는 자가 될 것이다.”

이 예언은 그분에게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분은 예수 믿은 첫 주부터 모든 공예배는 물론이요
화요 제자훈련과 교회 청소에까지 동참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언한 그날 이후로 육신의 질병과 마음의
병을 치유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주부터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은 남편을 사랑하고 얼굴에 빛이 나서 감동을 받은 온 가족이 주님께로 돌아왔다는
사실입니다. 다양한 영적 체험과 성령의 은사가 계속해서 그분에게 임하고 예언적 중보기도의 은사가
그분에게 임했습니다. 어느 날 제가 그분에게 이렇게 물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떤 집사님은 교회에서 꽃향기를 맡았다고 합니다. 주님이 강력하게 임하실 때 그런 현상들이 종종 있지요?
김선화 성도님은 혹시 그런 향기를 맡아본 적이 없습니까?”

그러자 그런 경험은 없고 화요 제자훈련 시간과 예배 시간에 두 번 하나님께서 성령의 불을 던져주셨는데
얼굴이 확 달아오를 정도로 뜨거운 불이 덮치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때 너무나 뜨거워서 옷을 벗고
싶을 정도로 온 몸이 불처럼 뜨거워지는데, 그렇다고 옷을 벗을 수는 없고 그래서 온 몸과 등에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지면서 자기 속에 있는 악한 것들이 성령의 불에 타서 빠져나가는 냄새를 맡은 적은
있는데 그것은 좋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역겨운 냄새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교회만 오면
가슴과 배 있는 곳이 불처럼 뜨겁고 본래 몸이 찬 사람인데 지금은 몸이 따뜻하다 못해 항상 뜨겁다고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손과 팔 있는 부위가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전기가 통하고 그리고 때로는 손이
거대하게 커진 것처럼 묵직하게 느껴진다고 고백했습니다. 신유의 은사가 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체험입니까? 물론 저는 저의 예언 기도만으로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제가 알기에 김선화 전도사님은 처음부터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만한 그런 성품과
기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머뭇머뭇 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언이 그 가능성을 신속히
끌어내고 불을 댕긴 것입니다. 이와 같이 참된 예언은 사람의 잠재력을 극대화하며 가능성을 현실로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예언이 가지고 있는 위력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언은 이렇게 유익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언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중심을 잡고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내리는
모든 크고 작은 결정에 예언 기도를 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더 이상 그들의 개인적인
자각들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삶속에서 개인적인 기도와 스스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예언 기도를 받는 것으로 대치해버립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은 교회 내에서 그리고 성도 개인의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을 대치하거나 급속한 해결책이 되도록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언을 이렇게 사용하는 것은 예언을 남용하는 것입니다.
릭 조이너는 “예언 사역”이라는 책에서 ‘예언 중독’에 대해서 경고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언에 중독되는 것은 원치 않으신다. 예언으로 지시를 받는 것보다 믿음과
지혜에 자라가는 것이 더 중요할 때가 많다.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실 때에는 우리가 겪게 될
어려움 때문일 경우가 많다. 우리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확증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유익하고 우리를 지도하는 말씀을 계속해서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성숙했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성숙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유아들은 계속해서 가르치고 돌봐야하지만, 아이가 자라면서
그런 것들이 점차 필요하지 않게 된다. 성경에서 사도들은 하나님이 손을 잡아서 이끄시지 않으셨다.
그들은 주님의 성숙한 사자로 보내심을 받았다.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예언의 말씀이나 확증의 필요 없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결정을 내렸다.
바울이 첫 번째 전도 여행에서 하나님께 구체적이고 예언적인 임무를 받았다. 가장 열매가 많았던
두 번째 전도 여행에서는 어디로 가라는 구체적인 말씀이 없었다. 그는 단지 그가 세운 교회를 점검하기
위해서 돌아가야 한다고 느꼈을 뿐이다. 우리가 어릴 때에는 손을 잡고 길을 인도해야 한다.
성숙한 사도는 모든 일에 대해서 구체적인 계시를 필요로 하거나 구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신실한 대사로서 결정을 내렸다. 그는 분명 예언적인 지시를 받는 것에 열려 있었지만,
그것에 의존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언에 중독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함정에 빠지지만 않는다면,
특히 예언하는 자가 단지 예언 사역자가 아니라 선지자인 경우에는 예언은 기회가 있는 대로
많이 받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언은 한두 번만 받으면 되고 자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지만 예언은 부분적입니다.

히 1: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고전 13:9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만일 예언이 전체적인 것이라면 예언은 한번 받는 것으로 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은 부분적입니다.
그러므로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모든 것이 더 정확해지고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빌 해몬 박사님은
“선지자와 개인적 예언”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개인적인 예언의 특징 중 한 가지는 ‘점차적이라는’ 점이다. 몇 년을 두고 점차적으로 새로운 정보와
계시를 더해주고 하나하나의 예언의 말씀과 더불어 밝혀지고 늘어가게 된다. 하나님의 뜻과 길의
구체적인 것이 축적됨으로써 그분은 서서히 우리의 생애를 위한 그의 전체 계획과 또 그 예언을
성취시키기 위한 방법을 밝혀주신다.”

그래엄 쿡도 “이렇게 예언하라”는 책에서 같은 말을 했습니다.

“예언은 진행 중이거나 개발 중이다. 주님은 결코 한 예언을 통해 우리를 향한 모든 것을 밝히시지 않는다.
오히려 주님은 지금이나 임박한 미래에 우리가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 우리가 예언의
이런 범위 내에서 행하고 우리의 삶이 이런 예언을 통해 격려되고 다듬어지기를 허용하면 우리는
이 예언에서 저 예언으로 이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로 연결이 되지 않고 관련이 없어 보이는
여러 원천으로부터 내가 받은 각 예언은 결국에는 나의 행로를 정리하고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결정을
전체적으로 잘 보여준다.”

저는 그 동안 제가 받았던 예언들을 통해 이것이 정말로 사실이라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받았던 신뢰할만한 예언인 빌 해몬 박사님의 예언은 비교적 개괄적인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되 아들아. 내가 네가 어렸을 때부터 이미 너를 불렀노라. 악한 영들의 계획에서
내가 너를 구원했노라. 네 삶 속에 내 뜻을 이루도록 내가 그렇게 너를 불렀노라. 이제부터 네가
네 삶 속에서 기적을 보리라.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에게 초자연적인 능력을 내가 너에게 불어넣노라.
그리고 내가 너에게 사도적인 그리고 예언자의 기름부음을 너에게 불어넣노라. 너는 이제 말씀의
지혜와 말씀의 지식으로 아주 정확한 예언을 선포하게 되리라. 이제 치유와 기적이 나타나는 것을
네가 보이게 되리라. 네가 우는 것과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것을 내가 다 들었노라. 내가 너에게 새로운
특별한 것을 마련해 두었노라. 이제 더 강력하게 나가라.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있노라. 네가 하고자 하는
네가 받기에 합당한 그것을 내가 배가로 너에게 부어주리라.”

그 다음에 받은 버논 오웬즈 박사님의 예언은 그보다 더 구체적이고 마이클 도노반 목사님의 예언은
그보다도 더 구체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받았던 샨 볼츠, 밥 존스, 신디 제이콥스, 질 오스틴의
예언들은 보다 더 구체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언을 받으면 받을수록 주님이 저에게 무엇을 원하시고
제가 주님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더 구체적인 그림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예언은 마치
구약성경에 두루 퍼져 있는 예수님에 대한 예언처럼 하나하나가 모여져서 전체적인 그림을 보여주는
모자이크와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믿을 수 있는 선지자나 예언사역자를 만나면 가능하기만 하다면
예언을 받으십시오. 빌 해몬 박사님을 위시해서 세계적인 선지자들도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예언을
존중하고 그것을 통해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회 닿는 대로 겸손한 마음으로 예언 사역을 받고
보다 통전적으로 자신의 사명과 그 사명을 달성하는 길을 파악하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고 주님 앞에 가서 칭찬과 상급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예언을 무분별하게 모두 받아들이지 말고 잘 분별하십시오.
예언을 분별하는 것이 성경적일까요? 물론입니다. 여기 두 증인이 있습니다.

고전 14: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살전 5:19-21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사람들은 만약 어떤 사람이 받은 은사가 성령의 은사라면 그 사람이 예언하는 것이 맞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분이 많겠지만 어떤 사람이 말씀의 은사를
받았다고 가정합시다. 그가 하는 모든 설교가 다 옳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지요. 예언의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 중의 한 분이었던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어떻게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 받을 수 있는가?”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사람들은 가끔 ‘하나님 하시는 것인데 맞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언은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령님의 영감 아래에서 사람들이 예언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은 완전합니다.
성령의 은사들 그 자체로는 완전하지만 그것이 불완전한 그릇들을 통하여 나타나기 때문에
성령의 은사들은 완전한 상태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언과 방언통역이 말씀으로
판단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강력한 선지자로 사용하고 계시는 릭 조이너도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예언이 오류가 없다고 한다면 이는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예언은 성령의 은사이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것은 거룩하게 여겨야 하지만, 또한 예언은 인간을 통하여 오는 것이므로
오류가 없을 것으로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오늘날 살아 있는 그 어떤 사람도 실수할 가능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누가
그것을 말하고 있느냐에 상관없이 예언을 판단해야 합니다. 오류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성숙한 선지자로부터 나온 예언이라 할지라도 판단을 받아야 합니다(고전 14:29).
예언과 그 예언을 한 선지자를 올바르게 판단하는 일이 성령을 소멸시키는 것은 아닙니다(살전 5:20-21).
그러므로 우리는 예언을 분별해야 합니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한 때는 부자였던 사람들이 예언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서 돈을 어디에다 투자해야
할지를 결정했다가 파산한 경우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습니다. 집회에 참석했던 그 사람은 예언자에게
예언을 받기 전에는 결코 사업상의 중요한 결정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해긴 목사님은
“당신에게 조언하는 사람이 누구든지 그들의 말에 계속 귀 기울인다면 당신은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주 부자였던
그는 결국 모든 소유와 집까지 날려버렸습니다. 해긴 목사님은 이런 경우를 아주 여러 번 보았다고 합니다.
저도 이와 비슷한 경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즉 예언을 분별하지 않고 무턱대고 받아들였다가 사업상의
큰 손해를 본 경우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언의 은사를 존중하되 예언을 분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예언은 오히려 큰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언을 분별없이 받아들이고
그 예언이 틀렸다고 예언하는 사람에게 책임과 화살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분명히
예언을 분별하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언을 어떻게 분별해야 할까요?

(1) 예언의 내용이 성경적인가?
우리는 먼저 예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만일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에는 영안이 열리고 계시를 받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또 성도들이 계속해서 영적으로 열리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처음 영안이 열릴 때 제가 가장 많이 해주는
말은 성경을 많이 읽으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환상이나 계시나 입신, 체험의 거의 대부분은 성경만
바로 알아도 분별이 가능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떤 것은 성경을 아는 것만으로는 분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성경만 많이 알아도 충분히 분별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에게 예언이나 그 밖의 계시의 은사들이 임하고 그 위에 영분별의 은사가 임하면
성경을 잘 몰라도 그 은사로 안전하게 분별할 수 있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과 영분별의 은사는 각기 그 영역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영분별의 은사가 성경의 무지로 인한
무분별을 대신해주거나 보충해주지 않습니다. 아무리 영분별의 은사를 받아도 성경을 모르면 분별하지
못하고 속는 많은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열리면 열릴수록 더 열심히 성경을 읽고
성경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성경이 예언을 분별하는데 얼마나 절대적으로 중요한지 한 가지 예를 들어드리겠습니다.
과거 시한부종말론자들이 환상과 계시와 각종 입신 간증에 입각하여 예수님의 재림 날짜를 못 박고
흰옷을 입고 기다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 다시 시한부종말론이 교묘하게 머리를 들고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날과 시간을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 해 정도는 알 수 있다는 유사 시한부
종말론을 펼칩니다. 그러나 그 해를 아는 것과 그 날을 아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둘 다 똑같이
혼란과 무질서를 초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말하지만 그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24: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저는 일부 사람들이 왜 그토록 예수님의 재림의 년도나 시기에 관심을 갖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재림의 시기가 아니라 재림 준비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우리는 계시를 인정하되 계시가 아니라
말씀 위에 서야 합니다. 그래야만 안전합니다.

(2) 예언하는 사람이 권위 아래 거하는가?
그래엄 쿡은 “이렇게 예언하라”라는 책에서 아주 중요한 점을 지적했습니다.

“신약의 예언은 구약의 예언과는 다르게 행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옛 언약
아래서 선지자들은 부패하고 반항적인 국가에 대해 홀로 의의 목소리를 발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신약에서 예언 사역자 혹은 선지자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원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공동 일원으로서 지역 교회의 예언사역자들은 은사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는 지역 교회의
예언 사역자들에게 ‘그들은 지역 교회에 적(등록)을 두고 있는가?’ ‘그들은 지역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충성하고 있는가?’ ‘그들이 다른 지역에서 사역할 때 그들을 보호해주고 변호해주는 것이 있는가?’
‘만일 잘못될 경우 어떤 시정책이 있는가?’ 우리는 이런 질문들을 해 봐야 한다…
신약에 보면 선지자는 독립적인 슈퍼스타가 아니라 우주적 교회의 일원으로서 섬기게 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이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예언을 분별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할 아주 중요한 요소를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그 예언자가 겸손히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 아래 순복하므로 교회에서 인정받는 자이며
목회자의 지지를 받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종교적인 교회에서 예언하는 사람이 목회자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같이 성령에 대해 열려있고 성령의 은사를
인정하는 교회에서 목회자의 인정과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다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전에 제가 “무당의 영” 에 대해서 설교할 때 인용한바 있습니다만 킹슬리 플레처 박사는 “지역교회에서
적절히 사역하는 참된 예언자”라는 주제의 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께 진실로 부름 받은 예언자들은 소속한 교회를 책임지는 목회자의 권위에 순복한다.
이런 예언자들은 목회 권위의 원리를 올바로 인식하고, 항상 교회의 ‘의사 결정권자’(set man)에게
권위를 양보한다. 5대 사역자 가운데 하나로서, 예언자들은 교회 직분과 감당하는 역할에 대해 전적이고
깊은 이해를 나타낸다. 진정한 예언자는 절대로 목회자의 권위를 침범하거나 조종하거나 자신을 높이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에, 공공연히 양떼들에게 목자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인다.
참된 예언자들은 예언 사역이 교회에서 이미 가르친 진리를 보충하거나 지지하는 것이지, 결코 그것을
대체하거나 더구나 상충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려고 노력한다. 참된 예언자들은 사역하는 동안에
교회 비전의 여러 양상들을 참고하면서 교회의 비전에 열심히 협력하려고 할 것이다. 목회자에 대한
전적인 지지와 사도에 대한 순복(교회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은 그가 참된 예언자인지 아닌지를
확실히 증거한다.”

또한, 탐 해몬은 “지혜와 계시의 영”이라는 주제의 글에서 예언자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예언 사역자는 끊임없이 교만의 영에 맞서서 자신을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예언자는 지역 교회에서
권위의 자리를 빼앗아 신적인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그 교회의 머리가 되려고 할 것이다.
비난과 반항을 피하라. 예언이나 분별의 말씀을 비난의 영이나 반항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목회자의
얼굴에 들이밀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어떤 형태로든 지도자를 교정하는 말씀은 공개적으로 제기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개인적인 자리에서 기도하는 마음과 존중하는 자세로 겸손의 영이 충만한 가운데
제시해야 한다. 몹시 많은 독불장군들, 곧 그리스도의 몸에서 마치 보안관이나 되는 양 행동하는
자존심 강한 예언자들은 목회자들의 입에 쓴맛을 남겼다. 왜냐하면 마음속에 개인적인 욕심을 품고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하고 말하는 예언자에게 목회자들이 커다란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 말하는 5대 사역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예언자들은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세워주고 양육하도록 부르심을 받는다. 예언자들은 독립적인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게 아니라
협력하여 사역하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어떤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권위에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예언자들이여, 충성스럽고 순종적이 되라! 예언자들이여, 지역 교회에서 머리의 위치에 서 있지 않은
사람은, 마땅히 그 교회의 지도자(목회자)가 성공할 수 있도록 흔들리지 않은 충성심과 헌신을 보여주어야
한다. 예언자의 위치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자기 은사를 사용하여 마음껏 지지하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
예언자의 사역에서 이런 사실을 분명히 목격할 때, 목회자는 대개 예언자를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예언자의 부르심이 성취되도록 공포할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사울을 사용하여
다윗에게 했던 것처럼, 예언자에게 험난한 앞길을 걷게 하실 것이다. 그래야만 예언자가 다윗처럼
자기 마음을 올바로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에는 많은 예언 사역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목회자의 권위 아래 순복하고 영적 질서 안에
거하지 않으면 절대로 사역자로 세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사역을 통해 교회를 세우기는
커녕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들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언사역자는
예언의 은사나 능력만으로는 될 수 없습니다. 권위에 순복하는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예언사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가끔씩 보면 교회에서 사역자로 임명하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에게 사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사람들을 경계하십시오. 그런 사람들의 예언은 받지도 말고 신뢰하지도 마십시오.
저는 적어도 저희 교회에서는 그렇게 예언하는 사람들이 바른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설사 그 사람의
예언이 맞다 하더라도 그런 사람과 많은 말을 하고 영향을 받으면 예언을 통한 유익보다 7배나 되는
손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즉 그 사람 속에 역사하고 있는 “반역의 영”에 전염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목회자의 권위에 순복하며 질서 안에 거하는가? 이것은 예언을 분별하는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시금석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예언자와 예언을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3) 예언하는 자가 성령의 열매를 맺고 있는가?
신디 제이콥스는 예언을 분별하는 방법에 대해 말하면서 “예언하는 사람의 삶이 어떠한가? 이것은
결정적으로 고려해야 될 문제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영분별에 대해 말할 때
자주 이런 말을 합니다.

“영분별은 진짜 영(그 사람의 영) 분별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언을 분별하면서 예언 자체만 분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언을 제대로
분별하려면 예언 자체보다도 예언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마 7:15-20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그러므로 예언자나 예언을 분별함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은 예언이 맞느냐 틀리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이 맺는 열매입니다. 왜냐하면 진실한 예언 사역자도 미성숙했을 경우 틀릴 수 있고 반대로
예언이 정확해도 발람처럼 거짓 선지자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모세가 경고했던 것처럼
바른 예언을 통해 우리를 그릇된 곳으로 인도합니다(신 13:1-3). 그리고 예언이 틀리는 것보다 그것이
훨씬 더 위험합니다.

고전 13: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이 때문에 개인적으로 저는 고린도전서 13장에 나타난 사랑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사람의 예언은
신뢰하지 않습니다. 신뢰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관심도 가지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언은
잘 하지만 아주 교만합니다. 그리고 비판적이고 무례합니다. 어떤 사람은 탐욕스럽고 은근히 돈을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말이 많고 너무 넉살 좋고 시끄럽고 수다스럽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사람이 가볍고
경망스럽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심령이 안정되어 있지 않고 불안정하며 감정의 기복이 너무 심합니다.
저는 이런 사람의 예언을 믿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사람들을 멀리 하시기 바랍니다.

(4) 예언의 내용이 얼마나 정확한가?
오늘날의 문제점은 예언하는 사람은 많은데 정확한 경우가 별로 혹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가
너무 심각하여 한 번은 제가 성령님께 그 이유를 여쭤본 적이 있는데 성령님 두 가지 이유를 저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첫째, 구약의 선지자들은 거룩했다. 그러나 요즘은 예언의 은사는 받았으나 거룩하지 않은 자가
너무 많다.

둘째, 구약의 선지자들은 요셉과 다니엘의 고백에 잘 나타나듯이 겸손했다. 그런데 요즘은 예언의 은사를
받은 적잖은 사람들이 너무 교만하다. 사탄이 교만 때문에 자기가 감히 하나님을 이길 수 있다고
믿은 것(이것은 가장 큰 미혹이었다.)처럼 교만은 미혹을 불러들인다. 그런데 예언의 은사를 받은
많은 사람들이 은사 때문에 교만해져서 요셉이나 다니엘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 대신
은사를 의지하여 사역한다. 이것이 예언이 부정확한 이유이다.

신 18:20-22 “내가 고하라고 명하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자가 만일 방자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

이 말씀에 보면 참된 예언의 표징이 될 수 있는 두 가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증험’과 ‘성취함’이
그것입니다. 증험은 현재적인 것이고 성취함은 미래에 속한 것입니다.
고전 14:23-25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바울은 예언에 “마음에 숨은 일이 드러나게 하므로” 불신자까지도 엎드리어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는
힘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신자이겠습니까? 마땅히 예언에는 마음에 숨은 일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이 바로 증험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저희 교회의 인터넷 카페에 보면 밥 존스의 예언적인 경험과 글을 소개하는
코너가 따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릭 조이너는 “횃불과 검”이라는 책에서 밥 존스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밥을 만났을 때 그가 나에 대해 꿈을 꾼 내용을 말하여 주었는데 놀랍게도 내가 처한 상황을
나타내고 내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지에 대한 해답도 주었다. 꿈 내용 중에는 나 자신도 알지 못했던
나의 가족상황이 있었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다 사실이었다. 그 후 몇 달 동안 밥은 말씀을 전해주던가
꿈의 내용을 말해주었는데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확하고 자세했으며 그 예언이 놀라운 방법으로
현실화 되었다.”

릭 조이너는 증험과 관련하여 또 다음과 같은 개인적인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종종 내가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예언의 말씀을 받을 때가 있다. 이런 예언은 대부분은 내가 하고
있는 전 사역의 방향을 결정하거나 나로 하여금 엄청난 시간과 정력을 요하는 선교나 사역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한 것들이다. 하나님이 보여주시지 않아서 아무도 알 수 없는 내 마음의 은밀한 무언가를
드러내는 일이 없다면 나는 보통 낯선 사람들에게 받은 지시하는 내용을 담은 예언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얼마 전 3년 전에 변애경 전도사로부터 “앞으로 책을 쓰게 될 것이고 사역의 많은 길들이 열리게
될 것이라”고 예언을 받았던 사람이 찾아와서 실제로 자기가 쓴 책 2권을 들고 와 예언대로 이렇게
책을 쓰게 되었고 그리고 사역의 길들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고 고백한 일이 있습니다. 이처럼 그 예언이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온 예언이라면 단순히 환상을 보고 음성을 듣고 계시를 받는데서 멈추지 말고
실제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예언한다는 사람들을 보면 예언이 틀리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물론 완벽한 사람은 없으므로 예언이 틀릴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런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난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런 예언이나 예언자를 신뢰하지 말아야 합니다.

(5) 그 예언이 소망을 주고 있는가?

렘 29: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신디 제이콥스는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가 점검해 보아야 할 또 다른 영역은 예언의 말을 통해 그리스도의 성품이 드러나는지 확인해보는
것이다. 예언을 하는 사람이 개발해야 하는 가장 필요한 성품 중 한 가지가 인자함이다… 그 사람은
판단적이거나 비판적인가?… 성령으로부터 오는 예언은 놀라게 하거나, 가혹하거나, 유죄판결하거나,
혹은 비판적인 경우가 거의 없다. 주님은 종종 우리를 교정하여 회개하게 하시기 위해 예언을 사용하시며,
어떤 때에는 우리 삶에서 잘못된 특정한 부분을 지적해내시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는
판결을 내리시지 않는다. 그 대신 그분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변화시켜 주기 위해 당신께 돌아오라고
부르신다.”
저는 신학생 때 잘못된 사람에게 거짓 예언을 받아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 당시 저는 감당키 어려운
시련을 통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내게 앞으로 이런 시련을 세 번 더 통과해야 한다고
예언했습니다. 이 예언은 저를 아주 낙담시켰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것을 도저히 견뎌낼 수 없을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예언과 명백히 반대됩니다. 예를 들어 요셉의 미래에 대한 꿈의 경우,
그가 다스리는 자가 된다는 것만 나오지 그것을 위해 형제에게 팔려 노예가 되고 감옥에 갇혀야 한다는
것은 나오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희망을 주어 어려움을 통과하는
순간에도 미래를 바라보고 인내하고 감당케 하시기 위해 좋은 내용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거나 절망과 좌절감을 심어주는
부정적인 예언은 대부분 하나님께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예언의 궁극적인 목적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긍정적인 것입니다. 물론 예언의 초기에는
부정적인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바르고 적절하지만 부정적인 면을 가진
예언도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 사역(렘 1:5-10)은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는 것”
이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부정적인 면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예언 사역은 또한 “건설하며 심는 것”이었습니다. 때로 우리는 긍정적인 것으로 대체하기 위해
어떤 것을 끌어내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파괴하고, 뿌리를 뽑고, 끌어내리고 파멸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있기 때문에 때로 우리는 부정적인 것이 드러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으로 세우고 건설하기 위한 것입니다. 첫째 부분은 부정적이지만 마지막 부분은 긍정적입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내는 예수님의 편지에 매우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칭찬거리가 있으면 반드시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책망할 것을
책망하신 후 그들에게 회개하면 받고 누릴 수 있는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심으로 결국 그들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이렇게 말씀하시고 역사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따라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시는데 관심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이 우리를 절망시키는가 아니면 격려하고 희망을 주는가? 이것을 살피십시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예언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6) 예언을 들을 때에 그것이 심령에 와 닿는가?
우리는 성경에서 예언에 대해 두 가지 서로 상반되는 듯한 지침을 발견하게 됩니다.

대하 20:20 “여호사밧이 서서 가로되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고전 14: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이처럼 한 군데서는 신뢰하라고 했고 다른 곳에서는 분별하라고 했습니다. 그럼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것
일까요? 왜냐하면 구약의 선지자와 신약의 선지자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선지자하면 구약이나
신약이나 같은 줄로 압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받을 수 있는가?”
라는 책에서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1959년 2월 어느 날 저녁 6시 30분경에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나타나신 것에 대해 간증했습니다. 그 방문에서 예수님은 선지자의 사역에 관하여 1시간 반 동안
말씀하셨습니다. 다음은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 중 일부입니다.

“신약의 선지자와 구약의 선지자는 초자연적으로 어떤 것을 보고 알았기 때문에 보는 자(seer)라고
불렸던 점에 있어서는 매우 비슷하다. 신약의 선지자도 초자연적으로 무엇을 보기도 하고 알기도 한다.
그러나 신약의 선지자는 교회에서 앞길을 안내하라고 그들을 세우지 않았다는 점에서 구약의 선지자의
위치와는 같지 않다. 새 언약아래 있는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선지자들을 통해 인도를 받으려고 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인은 선지자들을 통해 인도를 받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신약의 선지자 사역은 단지 사람들이 자신들의 영 안에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일뿐이다.
옛 언약 아래서는 오직 제사장, 선지자와 왕만이 이 직분을 맡을 수 있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었다.
구약 시대에 네가 지금 평신도라고 부르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 위에나 그들 안에 하나님의 영을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옛 언약 아래서는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영이 있으므로 사람들은 선지자로부터
인도를 구했었다…
새 언약 아래서는 ‘선지자들에 의해 인도 받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아들들이다’라고 하지 않고
새 언약은 말하기를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라고 말하고
있다(롬 8:14). 내가 나의 자녀들을 인도하는 최우선적인 방법은 내적 증거(the inward witness)에
의하여 인도하는 것이다… 이제 후로는 너를 내적 증거를 통해서 인도할 것이다. 너는 항상 내적 증거를
가지고 있고 너의 영 안에 점검하는 것을 가지고 있다.”

구약시대엔 선지자들에게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엔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모든 신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십니다(욜 2:28). 구약시대엔 선지자들이 지도자로서 앞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인도했습니다. 하지만 신약시대엔 성도들이 성령의 인도를 내적 증거를 통해
개인적으로 받고 있으므로 그것이 맞는지 아닌지 확증해주는 역할을 주로 합니다. 구약시대와 달리
신약시대엔 양자에게 다 성령이 계시므로 하나님의 등불인 영의 반응을 통해 어떤 예언이 진짜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언을 분별하는데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하나님의 사람들이 예언을 분별하는 방법에 있어서
이것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먼저,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어떻게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받을 수 있는가?”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개인 예언은 당신 자신의 영 안에 가지고 있는 것으로 당신이 판단해야 합니다.
만일 당신이 당신 영 안에 무엇인가가 없다면 개인적인 예언을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또, 빌 해몬 박사님은 “선지자와 개인적 예언”이라는 책에 이렇게 썼습니다.
“영의 반응은 우리 속의 깊은 데서 생겨납니다. 많은 성도들은 영적인 반응을 배의 위쪽 부분에서
느끼거나 아니면 흉곽 아래에서 느껴진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아니다. 조심하라’ 또는
‘어딘가 잘못되어 있다’라는 부정적인 영적인 증거는 대체로 초조하거나 흠칫하거나 혹은 편치 못한
느낌으로 어딘가가 잘못되었다는 깊은, 거의 이해할 수 없는 느낌으로 나타납니다…
영이 긍정적인 증거를 해주고 있거나 혹은 더욱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성령이 예언의 말씀이 옳고,
하나님께로 나온 것이며, 또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따르고 있다는 증거를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여실히 보여주실 때에는, 우리의 영이 성령의 열매로 반응을 보여줍니다. 깊은 형언할 수 없는 평안과
기쁨, 포근하며 사랑하는 느낌, 혹은 심지어 우리의 영이 흥분에 차서 아래위로 뛰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리고, 신디 제이콥스는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라는 책에 이렇게 썼습니다.
“성령은 나의 내면에서 어떻게 증거 하시는가?…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의 마음은
‘그렇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라고 외치게 된다. 우리 마음에 그 말씀이
공명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당신의 내면에서의 증거’라고 말하는 것의 의미이다.
브루스 요컴은 이렇게 말한다.
‘공명이라고 불리우는 간단한 물리적 원리가 있다. 물체는 각자 진동하는 고유 주파수가 있다.
어떤 주파수를 갖고 있는 물체의 옆에서 그와 동일한 주파수를 가진 한 물체를 진동시키면(예를 들면
어떤 종을 울림) 두 번째 물체는 저절로 진동하게 된다.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현상도 이와 같다. 우리가 공명하게 되는 것이다.’
때로 사람들이 당신에게 개인 예언을 할 때, 정작 당신은 어떤 긁히는 것 같은 불편함을 느끼거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영적으로 이상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모든 것이 성경적이고 예언의 말도
바르게 보인다. 즉각적으로 딱 꼬집어 지적할 수 없을지는 모르지만, 당신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안다.”

전에 아프리카에서 선지자학교를 하고 있는 마크 비써 목사님이 우리 교회에 집회를 인도하러 왔을 때
예언을 분별하는 방법에 대해 말하면서 “깊음이 깊음을 부른다”라는 멋진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을 영과 영이 서로 공명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참 멋진 표현이라고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이처럼 참된 예언은 듣는 사람의 영에 공명을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예언을 받을 때에 ‘이게 도대체 누구 얘기야? 이게 정말 나에게 하는 말이 맞아?’ 이렇게 생소한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십중팔구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예언이 아닙니다. 바른 예언을 들으면 평소 자기가
기도하면서 깨닫고 느끼고 소원하였던 많은 것들을 그대로 말하므로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고
눈물이 쏟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제가 변 전도사와 함께 미국 아틀란타에 집회를 갔을 때
예언을 분별하는 이런 방법을 가르쳐준 후 변 전도사에게 예언을 받으면서 이런 것을 느낀 분 손들어
보라고 하니까 예언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손을 드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이처럼 예언은
내가 알기는 아는데 긴가민가했던 것들에 확증을 주는 내용들이 거의 80%쯤 되고 나머지 10-20% 정도가
내가 모르는 새로운 것들을 가르쳐주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앞의 것에서 확증을 받고
뒤의 것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예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통해
예언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4. 예언이 땅에 떨어지지 않고 이루어지게 하려면 이렇게 하십시오.
성경은 사무엘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삼상 3:19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과일나무들을 보면 자라다가 열매를 맺지 못하고 땅에 떨어지는 과일들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달리 사무엘의 말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치 이와 같이 우리도
우리에게 대한 개인 예언들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모두 열매 맺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럼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여러분께 그 비결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1)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지난주에 저희는 예언하는 강사님을 초청하여 집회를 가졌고 전 성도들이 예언사역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부흥회 때 단지 예언 기도를 받는 것에서 멈춰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예언에 대한
가르침이 거의 전무하다 보니 단지 호기심으로 예언을 받고 예언을 흘러 떠내려 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히 2:1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

물론 이것은 복음 진리 혹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성구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언에도 적용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예언도 하나님의 말씀 중 하나입니다. 물론 예언이 성경과 똑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만큼은 틀림없습니다. 그 증거로 바울은
성경 저자들이 아닌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고전 14:36)라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언도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우리는 씨 뿌리는 비유를 설교뿐 아니라 예언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설교를 들은 후 마귀가
그 말씀의 씨앗을 빼앗아가지 못하게 하고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예언 역시 원수 마귀가 빼앗아가지
못하게 해야 하고 우리의 삶속에서 열매 맺게 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언에 대하여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어떤 것이
예언되어지면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즉 예언을 운명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언은 운명이 아니라 계획입니다. 예언은 예언 받은 사람의 반응과 선택에 따라 그대로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그래엄 쿡은 “이렇게 예언하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예언은 조건적이며 순종에 달려있다. 조건적인 것이 아닌 개인 예언은 없다. 개인 예언은 필연성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만일 우리가 서투르게 반응하고 불신앙에 가득 차 있거나 계속적으로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삶을 산다면 우리는 그런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기대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또한 예언의 말씀이 개조되거나 상당히 축소될 것이다. 또는 사울 왕의 경우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무효화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예언의 말씀을 받는 사람은 그 말씀에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협력할 필요가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진실하고 굉장한 예언을 받았으나 그것의 성취를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되길 원치 않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사람들 속에 속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든 개인 예언은 조건적입니다. 심지어 조건이 붙어있지 않은 경우라도 예외 없이 조건적입니다.
출애굽기 6:6-8절에 기록되어 있는 예언이 바로 그와 같은 경우입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해방과 가나안의 정복에 관해서 “내가 할 것이다”라고 7번이나 선언하셨습니다.
이 예언 속에는 조건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받았던 60만 명 중에서
오직 두 사람에게만 그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예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취소되었고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민 13:26-33).
사울의 일생도 부정적인 예화가 됩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예언적 지시에 따라서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을 받았던 왕이었습니다(삼상 9:15-10:8).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지시를 완전히 순종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이 같은 사울의 불순종은 그에 대한 예언을 무효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사무엘을 통하여
하나님은 사울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삼상 13:13-15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후손)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

이처럼 사울의 불순종 때문에, 그의 개인적인 예언은 무효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실패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개인 예언을 받았을 때 우리는 그것이 조건부적인 것임을 명심해야 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협조한다면 그 예언은 성취될 것입니다. 그러나 불순종한다면 그 예언은 없었던
것처럼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예언이 성취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고,
절대로 사울처럼 불순종하거나 반쪽짜리 순종을 하지 마십시오.
거듭 말하지만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은 예언 성취의 기반입니다. 개인 예언을 받았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말씀을 뛰어넘을 수는 없습니다. 물론 개인 예언에도 권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개인 예언보다 더 권위가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개인 예언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과 상관없이 높임을 받거나,
꿈이 이루어지거나, 복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성경 신명기 28장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개인 예언의 성취 즉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저주가 임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다”(렘 5:25)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좋은 개인 예언을 받았어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그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좋은 예언을 받고 그것이 이루어지길 기대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그거야말로 진짜 기복신앙입니다. 따라서 예언이 성취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2) 예언을 기도의 제목으로 삼고 기도하십시오.
예언의 성취를 경험하려면 예언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모든 개인 예언은 기도제목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선지자는 중보기도자였고 그들에게 많은 예언적인 계시들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치 선지자들이 그러했듯이 예언을 기도 제목으로 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래 전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존경하는 김혜자 목사님이 담임하시는 영동제일교회에 갔을 때
목사님과 그 교회에 대한 예언모음집을 만들어놓은 것을 읽어본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울산에서
목회할 때 저에 관한 중요한 예언들을 정리하여 “예언 모음집”을 만들어 교회에 비치해놓았습니다.
제가 그것을 만든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먼저, 예언 모음집을 통해 기존의 성도들과 교회에
새로 등록하는 성도들이 우리 교회의 비전을 이해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언 모음집을
만든 주목적은 아닙니다. 예언 모음집을 만든 가장 주된 이유는 표지에 써있는 그대로 그것을
중보기도 때에 사용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성도들에게 목회자와 교회를 위한 구체적인 기도제목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자주 이 예언 모음집을 펼쳐놓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또 기도모임 때에 여러 성도님들이
예언 모음집을 사용하여 하나님께 중보하며 기도하곤 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교회나 목회자를 위해
구체적으로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수 있고, 성령의 감화 속에서 기도할 수 있고,
특별히 믿음의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기도한 결과 실제로 우리가 받은 대부분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졌고 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저는 앞으로 서울 큰믿음교회와 각 지성전에서도 이런 예언 모음집을 만들어 기도할 필요가 있다고
느낍니다. 지난 주 저희 교회에서 있었던 집회 때 강사로 오신 이상열 목사님이 전에 예언한 것처럼
“교회 뿐 아니라 각종 기관들과 병원, 신학교, 방송국까지 세우게 될 것”이라고 다시 예언하시면서
“중보기도자들을 많이 세워서 이 모든 것들이 하나도 끊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권면한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그렇게 할 예정입니다. 여러분도 개인적으로 그렇게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처럼 예언 모음집을 만들어 개인기도나 중보기도용으로 사용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언은 그 성취를 위하여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으로부터 이에 대한 몇 가지
실 예를 들어드리겠습니다.

①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사건

창 15:12-14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하나님은 400년 만에 이스라엘이 애굽의 압제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실제로 언제 애굽에서 자유롭게 되었습니까? 그보다 30년이 지난 후인 430년 만입니다. 그러면 왜 30년이
지나도록 출애굽이 지연되었을까요?

출 2:23-25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이것이 출애굽기 2장의 끝 부분입니다. 그리고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위해 모세를 소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로 보건대 어떤 예언이 주어졌다고 자동적으로 그 예언이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그 예언을 붙잡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② 이스라엘 백성의 제1차 귀환

단 9:1-2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입던 원년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 년 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이처럼 다니엘은 선지자 예레미야의 글을 읽다가 바벨론에 포로가 된 이스라엘이 70년 만에 자유롭게
되어 귀환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이 예언을 읽고 단지 이를 믿고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 아니라 즉각 기도에 돌입했습니다.

단 9:3-4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이러한 다니엘의 반응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다니엘은 예언이 성취되려면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예언을 붙잡고
기도한 것입니다.

③ 이스라엘 백성의 제2차 귀환
성경은 유대인들이 두 번의 흩어짐과 다시 모임을 겪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첫 번째 분산은
한 번에 여러 방향으로 유대 민족을 흩으시지 않았습니다. 유대민족은 이방나라인 바벨론에서 함께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는 전 세계 구석구석, 즉 예레미야 때는 알려지지 않은 세계 곳곳으로
유대 민족을 흩으셨습니다. 이들의 소집에 관하여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예언했습니다.

렘 31:8-10 “보라 내가 그들을 북편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니 그들 중에는 소경과
절뚝발이와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하여 큰 무리를 이루어 이곳으로 돌아오되
울며 올 것이며 그들이 나의 인도함을 입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로 넘어지지 아니하고
하숫가의 바른 길로 행하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열방이여 너희는 나 여호와의 말을 듣고 먼 섬에 전파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 목자가 그 양 무리에게 행함같이 그를 지키시리로다.”

이 구절과 그 밖의 몇몇 구절들은 이스라엘의 재소집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을 땅 끝에서부터 모으되 특히 북편 땅에서 인도하여 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북편 땅” 즉 북쪽 나라는 구체적으로 어느 나라일까요? 북쪽나라가 어느 지역을 의미하는가를
알기 위해 우리는 그 당시의 지리적 배경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모스크바는 우리가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 중동에서 바로 북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에 관한 적합한 이해의
나침반으로 이스라엘을 염두에 두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자녀들이며,
하나님의 눈동자와도 같은 존재(슥 2:8)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서를 읽을 때 우리는 이스라엘을 기준으로
삼고 읽어야 합니다.
한편, 귀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특별한 상황들 중 일부가 예레미야 31장 8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경과 절뚝발이와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하여.”

이 구절을 기억해두십시오. 그러면 현재 우리 시대에서 이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예레미야는 이 예언이 어떻게 성취될 수 있는 지 그 비결을 보여줍니다.
“울며 올 것이며 그들이 나의 인도함을 입고 탄원할 때에 내가 그들을 인도하리라.”(9절)

예레미야는 ‘탄원’(supplicat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면 탄원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강렬한 기도’(Strong Prayer)를 의미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는가에 대한
비밀을 배우게 됩니다. 울면서 마음을 쏟는 필사적인 기도, 약속을 하나님께로 다시 상기시켜 드리며
기도하는 일(탄원)이 바로 예언 성취의 비밀입니다.
체코 공화국에 있는 모라비안 교회의 목사인 이발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1991년 이른 봄, 이발드는
스웨덴에서 목회를 하다 심장병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주치의는 그가 혼수상태에 빠졌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발드는 사랑하는 친구의 눈물로 다시 깨어났습니다. 깨어나기 전 그는 잠시
천국을 구경하였습니다. 이발드가 주님의 존전으로 이끌려갔을 때, 그는 다양한 체험을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 위에서 실제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그에게 보여주셨고 그중 몇 가지 사건을 이발드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발드는 에티오피아에서 시작한 하얀 다리가 구름을 통과하여 이스라엘로 뻗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또 만 오천 명의 흑인 에티오피아인들이 그 다리를 건너 이스라엘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발드가 주님께 물었습니다.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은 내가 에티오피아로부터 이스라엘로 보낼 유대인들이란다.”

이발드는 계속해서 주님께 여쭈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때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성도들의 기도가 이러한 일을 만든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이발드가 이것을 본지 3-4주가 지난 1991년 5월, ‘솔로몬 작전’이라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1991년 6월 1일 예루살렘 포스트지의 머리기사는 하루 만에 만 4천 명이 이스라엘로 돌아온다는
솔로몬 작전에 대한 기사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이발드가 본 그대로 에티오피아 유대인은 석방되었습니다.
기사는 이렇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포위되어 있던 1만 4천 명의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을 아디스아바바로부터 그들 조상의
고향으로 공수하는 숨 막히는 24시간의 토요일의 역사를 완수했다. 에티오피아 정부뿐 아니라 IDF와
외무부, 이스라엘의 다른 기관들의 공조에 의해 추진된 솔로몬 작전은 이미 이스라엘에 가족을
두고 있던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의 재상봉에 참여했던 수많은 이스라엘인들의 눈물을 자아내게 했다.”

AP 연합통신에서도 솔로몬 작전에 대한 기사를 다루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사의 어조가 마치 성경의
어조와 흡사합니다. 신문의 표제는 대담하게도 “이스라엘 1만 5천 명 귀환”이었고, 부제로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의 안전 이송을 위한 대량 항공물자 운송”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습니다. 그 기사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에티오피아에 살고 있던 1만 5천 명의 유대인들이 약속의 땅인 팔레스타인으로 다시 돌아왔다.
에티오피아의 수도인 아디스아바바에 포로로 잡혀갔던 유대인을 귀환시키기 위한 공수물자가
이틀간에 걸쳐서 집행되어 토요일에 완수되었다. 솔로몬 작전에 사용된 40대의 비행기가 실제로
에티오피아에 살다가 이스라엘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모든 유대인들(이스라엘의 흩어졌던
열 지파들 중, 한 후손)을 실어 날랐다. 대량의 공수와 그렇게 큰 피난은 성경에 나오는 그 옛날
출애굽의 추억에 잠기게 했다. 아이들은 걸었고, 절뚝거리며 나아갔고, 어떤 이들은 운반되기도 했다.
그들은 가져갈 수 있는 최소한의 경비만을 가지고, 헐렁한 옷을 입었다. 한 노부인이 활주로에 무릎을
꿇고 그 땅에 입을 맞추었다. 뿐만 아니라, 네 명의 신생아가 비행기 안에서 출산되었다.
‘이것은 매우 감동적인 경험이었습니다. 그날은 역사의 한 장을 펼쳐내는 특별한 날이었지요.’라고
어떤 조종사는 말했다.”

갑자기 웬 옛날 뉴스냐고 물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기사는 오늘날도 성경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를 확인하는 의미에서 예레미야서에 기록된 예언을 보겠습니다.

렘 31:8 “보라 내가 그들을 북편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니 그들 중에는 소경과
절뚝발이와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하여 큰 무리를 이루어 이곳으로 돌아오되”

성경의 예언 그대로 그들은 절뚝거리며 호송되었습니다. 여인들은 태중에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경대로 4명의 여인이 해산을 했습니다. 진실로 성경대로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발드가 성령님께 여쭈었던 “어떻게 이런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는 물음과
“성도들의 기도가 이러한 일을 만든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라는 성령님의 응답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시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순전한
예언적 약속들은 성경에 있는 것이든 성령님의 은사로 주어진 것이든, 우리가 인내심을 가지고 기도할 때
이루어집니다.

겔 36:37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예언을 받은 후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듯이 가만히 앉아서
예언이 성취되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믿음으로 예언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의 제목으로 삼아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예언을 성취시킬 수 있는 비결입니다.

(3) 예언을 무기로 삼아 믿음의 싸움을 싸우십시오.
이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들에 비해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인데,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보려면
예언을 무기로 삼아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이것을 세 가지로 정리해서 여러분께
설명해드리겠습니다.

① 예언은 강력한 영적 무기입니다.
다윗과 여호사밧 같은 이스라엘 왕들은 선지자에게 받은 예언에 근거해서 원수를 패배시켰습니다.
여호사밧은 예언이 제시해준 전쟁 계획의 구체적 지시를 따랐습니다. 그는 예언 때문에 승리를
확신하면서 싸우러 나갔습니다. 그리하여 적군을 패배시켰습니다.

딤전 1: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이처럼 바울은 디모데에게 예언을 가지고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아주 중요한 진리입니다. 예언은 영적 전쟁을 위한 강력한 무기 중의 하나입니다.
빌 해몬 박사는 “하나님의 무기 창고와 사역의 도구들 중에서 예언보다 더 축복이나 파괴를 위한
위대한 가능성을 지닌 다른 것은 없다.”고 까지 말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언이 영적인 무기가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예언은 성령의 검이기
때문입니다.

엡 6:17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성경 말씀에만 적용시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말씀은 로고스가 아니라 레마입니다. 로고스란 성경 전체를 가리키고
레마는 그 중 어떤 사람에게 주어지는 한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예언은 일종의 레마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은 성령의 검입니다. 예언은 성령의 검이며 따라서 아주 강력한 무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언을 사용하여 싸워야 합니다.

② 우리는 예언으로 믿음의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예언을 받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가 아닌가는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받아들이는 것도 거부하는 것도
우리의 자유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문제와 완전히 동일합니다. 단순히 선지자가 말했다고 그 예언이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이 성취되려면 선지자가 선포한 예언의 말씀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언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곧바로 전투가 시작됩니다. 사단은 모든 부정적인 상황과 환경을
만들어서 우리의 마음속으로부터 예언을 제거해버리려고 합니다. 또 예언으로 생겨난 이미지를
어떻게 해서든지 변질시키려고 합니다. 또 여러 가지 환경, 상황을 이용할 뿐 아니라 여러 사람들로부터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어”라는 말을 듣게 하여 예언 자체를 제거하려고 획책합니다.
예언을 우리의 마음속에서 제거하기 위해 원수가 시도하는 또 한 가지의 방법은 무관심을 조장하므로
선지자로부터 받은 예언과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 우리의 사명,
혹은 그 사명으로부터 오는 축복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1:18-19 말씀을 문맥에 주의하면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여기에서 바울은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디모데야, 네가 믿음에 굳게 서서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전에 주어진 예언을 기억하라. 내가 지금 고통당하고 있는 것은 일시적인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이 우리에게서 예언의 말씀과 예언된 미래를 빼앗아가려고 할 때 우리는 예언을 사용하여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벧전 5:8-9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처럼 마귀는 오직 믿음으로만 쫓아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언은 일종의 레마이며 믿음을 산출합니다.
예언은 믿음을 일깨우고 활성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언으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즉 예언을 사용하여 의심, 낙망, 실망, 절망감, 두려움, 부정적인 생각과 싸우고
그것을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서 몰아내야 합니다. 이것이 곧 우리가 예언을 사용하여 싸워야 할
영적인 전쟁입니다.

③ 많은 사람들이 예언을 가지고 싸워서 승리했습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이에 대한 많은 예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습니까?

히 11:17-19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이로 보건대 이삭의 장래에 대한 예언을 붙잡은 것이 아브라함의 승리의 비결이었습니다.
바울은 심한 고난과 핍박을 그토록 자주 받으면서도 어떻게 낙심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그가 반복되는 끔찍한 고난을 기쁨으로 견디어 낼 수 있었던 것은 아나니아가 그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을 당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예언해주었기 때문입니다.

행 9: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또 한 가지는 그에게 “후에는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라는 예언이 주어져있었기 때문입니다.

행 23: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의심할 여지없이 이 예언은 로마에 도착하기 전까지 바울에게 큰 용기와 평안과 희망을 주었을 것입니다.
빌 해몬 박사님이 쓰신 “선지자와 개인적 예언”이라는 책에 보면 개인적 예언 때문에 죽음의 사자와
싸워서 이긴 어떤 목사님의 간증이 나옵니다. 해몬 박사님은 이 목사님의 교회에서 평균 일 년에
두 번씩 설교하였습니다. 몇 년 전 하나님께서 가는 교회마다 항상 담임목사와 그 가족을 위해 예언하도록
지시하셨기 때문에, 이 목사님은 수없이 많은 예언들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예언 중에 하나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그의 두 아들을 사역에 종사하도록 훈련시킬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둘 중에 어느 하나도 사역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한 명은 영적인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둘 다 집에 있었고 10대 후반이었습니다. 그런데 1981년 그 목사님의
어머니가 심장병으로 별세하셨습니다. 몇 시간 후에 같은 종류의 심장마비가 목사님에게도 왔습니다.
그때의 일을 그 목사님은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그 날 밤 나의 어머니에게서 떠났던 죽음의 영이 나에게 찾아왔습니다. 나는 정말 내가 죽을 줄로
알았습니다. 나는 만일 내 아내와 내 동생 부부가 나를 위해서 선한 싸움을 하는 방법을 몰랐더라면
죽었으리라고 믿습니다. 나는 마치 내 육체에서 빠져나와서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내 자신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느낌이 들었습니다. 빌 해몬 박사가 나의 사역에 관해서 몇 개의
예언들을 나에게 주셨던 것을 성령께서 내게 되살아나게 하셨습니다.
그는 내가 나의 두 아들과 함께 언젠가 사역에 종사하리라고 말하였습니다. 그가 우리 교회에서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 놓았기 때문에, 나는 그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신뢰하였습니다. 성령께서 이러한 예언들을
나에게 환기시켜 주었을 때, 나는 생각했습니다.
사단아, 너는 나를 죽일 수 없다. 나는 아직까지 이 예언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그때는 혼자서
선한 싸움을 싸우기 시작했고 거의 즉석에서 나는 상태가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저 가만히 있었습니다. 내 가족이 나를 살려주도록 기도했으나 내가 싸움에 가담했어야 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하자마자 곧 나의 상태가 좋아졌습니다. 나는 디모데전서 1:18에 따라서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나는 싸워서 이겼습니다. 그것이 6년 전이었고 나는 아직도 건강합니다.”

이 목사님의 경우 예언들을 믿었고 그것을 무기로 삼아 싸웠기 때문에 죽음의 사자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언은 원수가 우리를 공격할 때,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선포된 예언들을 사용하여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합니다.
이외에도 짐 골이 쓴 “약속 위에 무릎 꿇고”라는 책에 보면 예언을 무기로 삼아 싸워서 승리한 좋은
간증이 하나 더 나옵니다. 짐 골의 아내는 불임이었습니다. 의학적으로는 완전히 임신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1980년 봄 어느 날 짐 골은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아들을 가질 텐데, 그 아이의 이름을 저스틴이라 부르게 될 것이다.”

그 후부터 그들 부부는 성경에 나오는 치유의 약속들을 되 뇌이면서 몸에 대하여 믿음을 선언하고
생명이 잉태되기를 명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했던 것처럼(딤전 1:18-19) 전쟁에서
무기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여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때때로 그들은 낙담했습니다.
그러나 계속 믿음의 싸움을 싸우고 전진한 끝에 결국에는 세 아이의 부모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언의 말씀으로 믿음의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그럴 때 놀라운 승리와 기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언을 사용해서 믿음의 싸움을 잘 싸우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지침을 따라야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예언을 녹음하거나 기록으로 남겨야 합니다.
빌 해몬 박사는 예언을 녹음하거나 기록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을 때 녹음에 보존되거나 아니면 써서 기록되지 않았다면 가치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중요한 내용은 곧 잊어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예언이 긴 경우에
우리의 두뇌는 모든 예언 내용의 지극히 적은 일부분밖에는 기억하지 못하게 됩니다.
나는 이러한 사실을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으며 즉, 내가 한 수천 마디의 예언 말씀 중에서
기록이 되지 않았던 경우에는 오직 두세 구절밖에는 기억해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읽어보고, 또 정확히 이해하게 되기 전에는 개인적인 예언을 제대로 행동에 옮길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해몬 박사님은 1960년도 중간 무렵 전까지만 해도 카세트 녹음기가 흔하게 사용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종교개혁의 진리를 퍼뜨리게 하도록 인쇄기의 발명을 가져오셨던 것과 똑같이, 하나님께서
예언사역의 회복을 위해서 빠르고 쉬운 녹음 장치를 때맞추어서 넉넉히 마련해주시려고 카세트 녹음기를
발명하게 해주셨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처럼 편리한 녹음 장비가 갖추어져 있음을 감사드리고 항상 개인 예언을 녹음해야
합니다.

둘째로, 예언의 내용을 자주 읽고 들으면서 묵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언의 내용을 오해하지 않고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믿음을 강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제가 빌 해몬 박사님의 컨퍼런스에 참석했을 때 저는 그분이 자신의 마음이 다운되고
낙망될 때 과거에 받은 예언들을 끄집어내어 다시 읽는 시간을 갖는다고 말씀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믿음과 소망을 주고 담대함을 가져다줍니다.

셋째로, 예언의 내용을 입으로 고백하며 믿음으로 선포해야 합니다.
이것은 실제로 접전을 벌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예언을 무기로 사용할 수 있으며
승리할 수 있습니다. 톰 브라운이 쓴 “믿음의 예언으로 당신의 운명을 바꿔라!”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말씀에 입각하여 믿음으로 선포할 때 이루어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예언을 선포하는 것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케네스 해긴 목사님에게 나타나셔서 “말하는 것을 얻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언을 입술로 시인하고 믿음으로 선포하십시오. 그러면 예언이 현실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넷째로, 예언의 말씀을 기도의 제목으로 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자세히 설명했으므로 설명을 약하겠습니다. 여러분, 이 4가지를 기억하고 여러분이 받은
예언으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십시오. 그래서 믿음을 활성화 시키고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그럴 때에 하나님의 때에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국내나 해외에 집회를 인도하러 갈 때 대부분 제 친동생인
변애경 전도사와 동행합니다. 그래서 저는 말씀을 전하고 안수 사역을 하고 변애경 전도사는
예언 사역을 감당합니다. 이렇게 저희가 팀으로 사역하면서 문제점으로 떠오른 것 중 하나가
때로는 예언이 사람을 교만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정도는 예상되는 일이지만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목회자가 보기에 그리고 실제로 영적으로나 인격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이 좋은 예언을
받고 그 예언을 자기가 옳다는 것에 대한 확증으로 생각하여 더욱 오만해지는 경우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예언은 어떤 개인에 대한 확증이 아닙니다. 예언은 그 사람이 옳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것이 아니며 단지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제 경우 아무리
좋은 예언을 받아도 그 예언을 자신의 상태로 착각하지 않으며 그 예언 때문에 교만해지지도 않습니다.
저는 예언을 받은 후 이렇게 생각합니다.

‘웬 말인지 웬 은혜인지 주님은 나를 이렇게 사용하려고 하신다. 그런데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얼마나 부족한가? 오 주여, 나를 용서하옵소서. 그리고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자로 저를
빗어주옵소서.’

예언은 부분적인 것입니다. 예언은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가르쳐주면서도
그의 현재의 죄나 불순종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경우에 그러합니다.
이 때 우리가 착각하지 말 것은 하나님께서 숨겨진 죄나 불순종이 있는데도 좋은 예언들을 주신다고 하여
하나님께서 그 죄를 문제 삼지 않으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고
영원히 변역치 않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그래엄 쿡은 “이렇게 예언하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결코 죄를 묵과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의 삶속에 숨긴 문제, 죄, 멍에나 불순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받은 예언이 모두 긍정적인 것이라고 해서 주님이 우리를 전적으로 인정하여
우리 죄나 현재 우리의 삶을 묵과하셨다고 결론지어서는 안 된다.
모세가 바로 이런 상태에 처해 있었다(출 3장). 그는 매여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내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약속 받은 상태였다. 이 예언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증거 되었다.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고 그의 손에 문둥병이 발했다. 두 가지 징조가 예언의 말씀을 증거 했다.
모세는 잠시 생각한 후에 마침내 애굽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하나님은 그를 만나 죽이려고 하셨다.
왜? 모세는 그의 아들을 할례하지 않은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출 4:24-26).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자인
모세일지라도 하나님과의 언약을 온전히 수행하지 않는 한 효과적인 사역을 감당할 수 없었다.
할례는 그 언약의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불순종으로 인해 그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했다.
비록 그는 예언의 말씀을 받았고 목표가 있었지만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한 상태였다. 모세가 받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에는 그의 삶에서
숨겨진 할례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예언의 말씀이 죄를 언급하지 않았다고 해서
주님이 그의 불순종을 용납하신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과의 언약에 순종하지 않음으로 해서
모세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이런 경우를 많이 본다. 내가 언젠가 함께 사역한 적이 있는 사람이 있는데,
사람들이 그의 삶에 대해 예언한 후 몇 개월에서 일 년 후에, 그가 수 년 전부터 행한 불경건한 행동
때문에 도덕적으로 타락하는 것을 나는 목격했다. 나와 친분이 두텁고 또 사역을 함께 한
주요 사역자들 중에 비도덕적인 행동이나 기만에 빠진 사람들이 더러 있다. 나와 사귀는 동안
그들은 여전히 죄를 짓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알려주시지 않았다.
되돌아볼 때 나는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자기들에게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하고
사역이 성공적이고 또한 그들의 불경건한 삶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 모두가
하나님이 그런 일에 개의치 않으신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생각이 굳어지면
우리는 하나님이 지붕에 올라서서 외치시게 하는 일만 남았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그들의 필요를
고백하고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그들 모두가 사건에 노출되었다. 어느 누구도 교회의 징계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또한 어떤 겸손도 보이지 않았다. 죄악이 노출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회한은 있었지만
그들은 그들의 삶을 견제하고 균형을 유지해주는 것은 거부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언을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으로 착각하여 교만하여지거나 미혹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으로 자기 자신을 살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언을 통해
약속하신 대로 정말로 그렇게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지자나 예언 사역자로부터 놀라운 예언들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 예언이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 하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받은 예언이
언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래엄 쿡의 예언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언제 이것이 이루어집니까?”

그러면 그는 이렇게 대답을 한다고 합니다.

“아마 당신이 준비되는 대로일 것입니다. 당신은 주님을 계속 기다리게 하실 것입니까?”

예언은 단지 하나님께서 하시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너희가 준비되면 내가 이렇게 하겠다 라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예언은 가능성을 선포하는 것이지 필연성을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언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언을 받은 후
그 예언이 언제 이루어지나? 하고 시간을 재고 있기 쉽습니다. 그러나 같은 시각 하나님은 시간이 아니라
우리의 성장을 재고 계십니다. 사람은 시간을 재지만 하나님은 시간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의 성장을
재십니다. 왜냐하면 예언의 성취에는 우리의 성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꿈이 성취되려면 그가 성장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괴롭히기 위해 그를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게 했을까요? 아닙니다. 요셉이 성장하도록 일련의 과정들을 그를 위해 특별히 준비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요셉이 통과한 그러한 힘든 과정들을 겪으면서 소리칩니다.

“하나님, 언제입니까? 언제 이 힘든 과정이 끝이 납니까? 그리고 언제 주님이 약속하신 나의 꿈이
이루어질 것입니까?”

여기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냐 하면 우리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성장했을 때입니다.
그때 힘든 연단의 시기는 지나가고 꿈이 이루어지는 영혼의 봄날이 도래합니다. 예언이 성취되는
시기는 마치 예수님의 재림의 날짜와 같아 우리가 미리 앞당길 수도 있고 늦출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깨지고 변화되는 것이 곧 그 시간을 앞당길 수 있는 유일한 비결입니다.

예언에 관한 추천도서

– 케네스 해긴의 “어떻게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받을 수 있는가?”(믿음의 말씀사)
– 빌 해몬의 “선지자와 개인적 예언”(나단)
– 그래엄 쿡의 “이렇게 예언하라!”(은혜출판사)
– 신디 제이콥스의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죠이)
– 릭 조이너의 “예언 사역”(은성출판사)
– 스티브 탐슨의 “당신도 예언할 수 있다!”(순전한 나드)
– 피터 와그너의 “목사와 예언자”(진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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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이장환 목사 – 영적사역훈련(7)-방언의 능력 (미스헤븐 아비가일 /2010.03.22)
  • 작성자 : foreve...
  • 작성일 : 2016.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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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이장환 목사 – 영적사역훈련(8)-방언의 능력 (미스헤븐 아비가일 /2010.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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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 2016.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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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방언기도 풀이 간증 (사도나다나엘 /2010.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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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 2016.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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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국내 첫 ‘방언 신학연구서’ “방언은 끝나지 않았다” [1] (사도나다나엘 /2010.01.2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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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방언의 실제 유익 [1] (사도나다나엘 /2009.12.0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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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방언기도의 능력 [2] (사도나다나엘 /2009.12.0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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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예언의 능력 – 존 아놋 (사도나다나엘 /2010.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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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개인예언 : [받기]에서 [이루기]까지 (사도나다나엘 /2010.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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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 2016.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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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목사님과 교회 지도자들에게 드리는 말씀(스티브 탐슨) (사도나다나엘 /2010.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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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데이비드 오워 목사님 – 미국의 남부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를 예언하는 영상 (Daniel /2010.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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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예언적 말씀의 그릇들 – 데일 파이프 (Daniel /2010.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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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글 입니다.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 변승우 (사도나다나엘 /2009.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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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거짓 예언자들의 기원 – 당신도 예언할 수 있다. (스티브 탐슨 著) 중 [2] (Daniel /2009.12.0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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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예언적 말씀의 그릇들 [1] (Daniel /2009.11.0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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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우리의 마지막 종교적인 적 (Daniel /2009.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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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예언 (“기름부음의 이해” 중 – 케네스 해긴 목사님 지음) (Daniel /2009.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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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예언 (사람낚는어부 /2008.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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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예언사역 강좌 (드보라 /2009.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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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받은 개인 예언으로 싸우라: 공세를 취하라! (사도 요한 /2009.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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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 2016.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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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개인예언의 일곱가지 초자연적 특성(데니스 크래머) [2] (사도 요한 /2009.07.13) 1
  • 작성자 : foreve...
  • 작성일 : 2016.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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