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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통역이란 무엇인가? / 김동수 (사도나다나엘 /2009.12.03)

2016.07.12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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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통역이란 무엇인가? / 김동수

한국 교회에서 방언의 은사를 경험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출석 교인이 100명 이 넘는 교회 가운데 방언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교회는 많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많은 신학자들이 방언에 대해서 무관심 내지는 적극적 부정의 입장을 취하고 있을지라도 평신도들은 방언의 은사를 계속해서 체험해 왔다.
그런데 방언의 은사와 짝을 이루는 방언의 통역의 은사는 어떠한가?
이 은사는 분명히 바울이 9가지 영적 은사를 열거하면서 언급한 은사중 하나인데도 불구하고(고전 12:10) 다른 모든 은사 중에서도 가장 무시해왔던 혹은 이것에 대해서 무지했던 은사다.
바울은 분명히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고전 14:13) 라고 권고하고 있지만 우리는 지금 이 권고를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통역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는 것인가?

문제는 방언 통역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바울은 방언에 대해서는 분명히 신자가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하나님께 그 영으로 신비한 내용과 방식의 기도를 하는 것을 지칭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고전 14:2).
그런데 방언 통역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있다.
당시 바울과 고린도 교회 사이에는 이미 방언 통역에 대한 개념을 공유하고 있었고 그것을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천 년이 지난 우리에게 방언 통역이란 개념은 설명을 요한다.
우선 방언과 방언 통역은 연관이 있다.
그러면 어떤 연관인가? 앤쏘니 씨슬턴(A. C. Thiselton)같은 학자는 방언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언어라면 통역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는 언어라고 주장한다. 그는 필로와 요셉푸스 같은 고대 작가들의 ‘통역’이라는 단어를 이런 뜻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방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방언은 적극적으로 피하라고 가르친 것이고, 대신에 통역을 권장한 것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고린도전서 14장을 한 번 쭉 읽어보기만 해도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바울은 자신이 다른 어떤 사람에 비해서 방언을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스스로 말했고(고전 14:18) 예배 가운데 있어야 할 요소로서 방언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고전 14:26)은 이러한 주장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거해 준다.

이러한 주장의 연장선상에서 정용섭이라는 한국의 한 신학자도 방언 통역을 영적인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의 상황에 맞게 잘 풀어주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는 성경을 왜곡 해석하여 비복 음적인 주장을 하는 것을 방언이라 하고 그러한 것을 바로 잡는 것을 방언 통역이라 한다.
문제는 이러한 주장들이 꽤 매혹적이지만 방언과 방언 통역의 관계를 잘 설명해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맞으려면 바울은 방언은 폐하고 통역만 하라고 해야 했고, 또 방언 없이도 통역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방언 통역은 반드시 방언을 전제한다. 이것은 실과 바늘과 같은 것이다.

방언 통역은 방언을 모국어로 알아듣는 것인가?

방언이 영적인 은사이듯이 방언 통역도 영적이 은사다.
이것을 자연적 재능이나 지적인 연설로 해석하는 것은 영적인 은사를 자연적 은사 내지는 재능으로 오해하는 전형적인 해석적 오류다. 방언과 마찬가지로 방언 통역은 성령의 초자연적인 현시로서의 은사다(고전 12:7).
방언이 어떤 언어를 배워 그 뜻을 알아서 말하는 것이 아니듯이 방언 통역도 자연적으로 들려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 혹은 자신이 방언을 할 때 순간적으로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그 뜻(혹은 그 뜻의 일부)을 성령의 나타남으로 말하는 것이다.
신비주의에 빠진 사람 중에서는 방언 통역은 방언이 자기 모국어로 귀에 들린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 가능성을 100%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방언 통역이 고린도전서 12장에 언급된 다른 성령의 은사와 성격이 같은 것을 볼 때 이 은사는 귀에 들리는 은사라기보다는 순간적으로 방언의 뜻이 깨달아져 그것을 모국어로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식의 말씀의 은사와 비슷한 것으로서 전혀 알지 못하는 내용을 성령의 나타남으로 갑자기 알게 되는 것이다. 지식의 말씀의 은사는 그것을 말하기 전에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고, 방언 통역은 방언을 하고난 다음 그 방언에 대한 통역으로서의 말을 하는 것이다.

방언 통역은 방언의 내용을 통역하는 것이다

방언 통역은 방언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
한 마디로 말해 방언 통역은 방언의 내용을 모국어로 옮기는 것이다.
바울은 방언 통역의 방법을 방언을 먼저 한 다음, 그 다음에 통역을 하라고 말한다
(고전 14:27).
바울은 방언을 두 세 사람이 하고 그 다음에 한 사람이 그 방언에 대한 통역을 하라는 예를 든다. 반면에 예언을 통역할 필요가 없다.
방언과 같이 두 세 사람이 말하고, 그 다음에는 그 내용이 성령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 분변해야 한다(고전 14:29).
그렇다면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예언과 방언통역은 비슷한 목적과 방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각각 교회 구성원의 신앙성숙을 위한 것이다.
예언은 하나님의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신자들에게 들려줌으로서 회개 혹은 위로하는 것이라면, 방언 통역도 결과적으로 기도의 내용이 통역되어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의 회개 혹은 위로를 촉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방언 통역을 체험할 수 있는가?
바울의 조언대로 우리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통역하기를 기도하면 된다.
통역은 귀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들리는 말을 담대하게 말하는 것이다.
물론 마음으로 들리는 말이 자기 자신의 보통 때의 생각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이것은 예언, 계시, 지식의 말씀, 지혜의 말씀의 은사에 모두 걸려 있는 문제다.
하지만 이것이 문제라고 해서 문제 거리는 아니다.
성령충만한 상태에서 우리는 자신의 지식이 아닌 초자연적인 소리를 분명히 들을 수 있다. 또 성경은 그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성령의 은사를 준다고 하는 면에서 우리는 그런 방식을 거부할 필요는 없다.
다만, 예언의 은사의 진위를 분별해야 하듯이 방언통역의 은사도 분별해야 할 것이다.
분별이 무서워서 마음속에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음성을 거부하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사용하면 보다 분명히 자신의 음성과 성령의 음성을 구별하게 될 것이다.
필자는 우리 한국 교회에 방언의 은사가 널리 나타나듯이 올 해에는 방언 통역의 은사가 널리 나타나기를 소망하고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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