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 방언 성령의 은사

성령의 은사들에 관한 모든 것을 나누세요.

방언은 하찮은 은사인가? /김동수 (사도나다나엘 /2009.12.03)

2016.07.12 06:46

foreverthanks

조회 수460

방언5
김동수
방언은 하찮은 은사인가?

우리 교계나 학계에서는 방언을 사탄으로부터 온 것이라던가, 아니면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에서 그냥 뇌까리는 말이라든가, 혹은 가난한 민초들이 하소연할 데가 없어 이상한 말이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것이라든가 하는 성서에 나오는 방언을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목소리는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에, 방언을 인정하면서도 아직도 방언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인가 하는 소극적 인정의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바울이 방언을 인정한 것은 방언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이라기보다는 방언으로 인해 문제가 생긴 고린도교회를 꾸짖기 위해 마지못해 수사적 정책으로 인정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바울이 방언을 하찮은 은사로 취급했는가에 대해서 고찰해 볼 것이다.

바울은 방언을 하찮은 은사로 취급했는가?

사람들은 바울이 방언을 하찮은 은사로 취급한 증거로 바울이 은사를 열거할 때마다 방언을 거의 매번 마지막에 위치시키는 것을 든다(고전 12:8-10; 28-30; 14:26). 특히 바울이 은사 혹은 직분을 언급할 때는 첫째, 둘째, 셋째라는 서수를 사용하는 데 여기에서 방언에 맨 마지막에 나오는 것을 보면 방언의 은사가 은사 중에서 가장 미미한 것이라는 것이 증명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여러 사람들에게 상당히 설득력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바울이 은사에 대해서 설명하는 기본 논조를 보면 이러한 주장이 맞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바울은 은사에 대한 태도와 실행에 대해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꾸짖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꾸짖고 있는 것인가? 가장 우선적인 것은 은사에 대해서 파당적으로 생각하는 태도를 꾸짖는 것이다. 바울은 여러 은사를 열거하기에 앞서 은사가 모두 한 성령으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강조한다(12:4). 고린도 교회는 영향을 받은 사람에 따라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심지어 그리스도파로 나뉘었듯이(고전 1:12), 예언파, 방언파, 병고침 파 등으로 나누어질 위험에 처한 것이다. 특히 은사에 관해서는 무엇이 더 중요하고 상위에 있는지에 대해서 서로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가 몸인 교회의 지체이고, 각 지체가 경험한 각각의 은사에는 근본적으로 위계가 없음을 비교적 상세하게 논증하고 있다(고전 12:12-26). 그러므로 은사에 위계가 있다고 전제하고 방언의 은사가 가장 낮은 단계의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바울의 입장이 아니다.

바울은 사랑을 최고의 은사라고 말했는가?

바울이 열거한 9 가지 은사에는 위계가 없다 하더라도 이른바 ‘최고의 은사’인 사랑보다는 열등한 것으로 취급한 것은 아닌가?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을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12:31) 이어서 바울은 13장에서 사랑을 말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러 은사 중에서 가장 큰 은사를 말하고, 이어서 사랑을 언급하는 것을 볼 때 사랑을 최고의 은사라고 제시한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헬라어를 조금만 알고 문맥 성경만 보아도 위와 같은 주장은 맞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우선, 고린도전서 12:31은 학문 연구에 의해서 잘 분석해 놓은 현대의 많은 번역본에서 보면 두 부분으로 나누어짐을 볼 수 있다. 상 반절, 즉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것은 12장의 결론이고, 하 반절, 즉 “가장 좋은 길”에 대한 것은 13장에 걸리는 것이다. 바울은 은사에 대해서 상술한 후 결론적으로 여러 은사들을 적극적으로 사모하라는 취지로 “더욱 큰 은사(들)”-바울이 어떤 특정 은사를 최고의 은사로 취급한 것이 아님-를 사모하라고 하면서, 동시에 은사가 사용되어야 하는 최고의 길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다.
또한 바울은 사랑이 방언보다 절대적으로 더 좋은 것이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흔히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의 찬가라고 해서, 바울이 사랑을 독립적으로 찬양한 것으로 취급하지만 여기서 바울이 말하려고 했던 주제는 은사 -특히 방언의 은사-와 사랑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바울이 말하려고 했던 요지는 사랑이라는 길을 따라가지 않으면 은사는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이다. 은사는 사랑의 길을 따라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곧 바울이 주장한 것은 은사무용론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의 길을 따라 은사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라는 은사에 대한 바른 은사 활용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13장의 결론이요, 14장의 서론이라고 할 수 있는 14:1에서도 명확히 나타난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바울은 사랑과 은사 어떤 것도 희생시키지 않고 양자가 교회의 삶 가운데 다 있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 것이다.

바울은 예언을 방언보다 더 좋은 은사라고 추천했는가?

그런데 바울은 방언과 예언 중에서 예언이 더 좋은 은사라고 생각해서 이것을 더 적극적으로 추천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14장을 얼핏 보면 바울은 이러한 생각을 했던 것처럼 보인다. 우선, 바울은 신령한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면서 그 중에서도 특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말한다(14:1, 5). 바울은 심지어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고전 14:5하)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언뜻 보면 바울은 은사에 있어서 우열을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방언이 통역되지 않은 상태에서 교회에서 행해지면 거기에는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에, 효과에 있어 그것을 통해 다른 신자에게 유익을 주는 예언만 못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울이 예언과 방언을 비교할 때 그 효과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지, 그 본질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통역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방언이 교회 예배 가운서 말해지는 것에 대해서는 상당한 정도의 경계를 하고 있다. 심지어 이러한 방언은 구약 성서에서 불신자들에게 행해진 심판의 표지라고 말하기까지 한다(14:21-22). 그래서 바울은 교회 안에서 신자들의 신앙 함양을 위해서는 예언이 사용되기를 적극적으로 권한다. 하지만 바울은 방언사용을 금지한 것은 아니다. 개인 기도로서는 자신도 그 어떤 사람보다도 방언으로 기도를 많이 하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말하면서(14:18), 동시에 교회에서는 공적으로 방언을 하면 반드시 통역이 되어야 함을 역설한다(14:13, 27-28). 결론적으로 바울은 예배 시간에 있어야 할 요소로서 방언을 언급하면서(14:26), 방언과 예언 모두를 인정하면서 이것을 사모하고 금하지 말라고 한다(14:40).

방언에 대한 태도 변화를 위해서

사실, 우리 각자가 바울이 방언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한 고린도전서 12-14장을 읽지만 이것을 읽고 난 후 바울이 방언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을 취했는가에 대해서는 각자의 이해가 너무 다르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물론, 우리는 어떤 한 구절이나 긴 본문을 해석하는데 있어 하나의 해석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떤 구절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해석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하나의 단어, 구절이 아니라 전체적인 바울의 기조에 대한 이해에 대해서도 사람들의 입장이 이렇게 극명하게 대조되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이것은 아마도 각자의 방언에 대한 선입견에서 기인한 것을 것이다. 이 선입견 혹은 체험은 개인적인 것일 수도 있고, 교단이나 교회의 입장을 따르는 집단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도 성서 앞에서 완전히 객관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할 때 우리 각자는 각자가 지금까지 견지해 온 태도가 과연 바울이 성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진지하게 들으려고 했던 것인지, 아니면 내 자신의 기존 입장을 주입하려 한 것인지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필자의 연구와 사역 경험을 통해서 볼 때-이것은 비단 필자만의 경험이 아니라 여러 다른 동료 학자들과 신자들의 경험이기도 한데-방언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인자는 방언 체험 유무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순환논법의 오류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방언에 대한 바울의 입장을 알아야 그것을 체험하는 것인데, 일단 체험해야 태도가 달라진다는 논법에 잘 맞지 않는다는 않는다. 하지만 체험과 지식이라는 것은 특히 신앙 지식일 때 그것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형태, 즉 다이나믹하게 연결된 것이지, 무엇이 다른 것을 반드시 앞선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성서를 해석하면서 체험하고, 또 체험하면서 성서가 새롭게 해석된다.

김동수 (평택대 교수)

댓글 쓰기

비회원 프로필 이미지
댓글 0
138 예언을 분별하는 일곱단계 (timothykim /2014.10.31)
  • 작성자 : foreve...
  • 작성일 : 2016.07.12
  • 조회수 : 511
foreverthanks 2016.07.12 511
137 첫번째 경험 [1] (사람낚는어부 /2008.08.22) 1
  • 작성자 : foreve...
  • 작성일 : 2016.07.12
  • 조회수 : 441
foreverthanks 2016.07.12 441
136 방언의 은사 – 손기철장로님의 책에서 [3] (사도 요한 /2008.08.19) 1
  • 작성자 : foreve...
  • 작성일 : 2016.07.12
  • 조회수 : 458
foreverthanks 2016.07.12 458
135 신자들의 삶에 힘을 주는 방언 [1] (사도 요한 /2008.08.18) 1
  • 작성자 : foreve...
  • 작성일 : 2016.07.12
  • 조회수 : 404
foreverthanks 2016.07.12 404
134 방언이 신자의 삶에 실제적으로 유익을 주는가? (사도 요한 /2008.08.18)
  • 작성자 : foreve...
  • 작성일 : 2016.07.12
  • 조회수 : 459
foreverthanks 2016.07.12 459
133 고전 12-14장에 나타난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 (사도 요한 /2008.08.17)
  • 작성자 : foreve...
  • 작성일 : 2016.07.12
  • 조회수 : 423
foreverthanks 2016.07.12 423
132 성령충만의 첫 입문인 방언 (사도 요한 /2008.08.14)
  • 작성자 : foreve...
  • 작성일 : 2016.07.12
  • 조회수 : 424
foreverthanks 2016.07.12 424
131 방언 통역(헤르메니아 글로손) [1] (사도나다나엘 /2009.12.03) 1
  • 작성자 : foreve...
  • 작성일 : 2016.07.12
  • 조회수 : 499
foreverthanks 2016.07.12 499
130 이런 방언도 있는가? [1] (사도나다나엘 /2009.12.03) 1
  • 작성자 : foreve...
  • 작성일 : 2016.07.12
  • 조회수 : 507
foreverthanks 2016.07.12 507
129 방언 통역의 은사 [3] (사도나다나엘 /2009.12.03) 1
  • 작성자 : foreve...
  • 작성일 : 2016.07.12
  • 조회수 : 543
foreverthanks 2016.07.12 543
128 방언통역이란 무엇인가? / 김동수 (사도나다나엘 /2009.12.03)
  • 작성자 : foreve...
  • 작성일 : 2016.07.12
  • 조회수 : 532
foreverthanks 2016.07.12 532
현재글 입니다. 방언은 하찮은 은사인가? /김동수 (사도나다나엘 /2009.12.03)
  • 작성자 : foreve...
  • 작성일 : 2016.07.12
  • 조회수 : 460
foreverthanks 2016.07.12 460
126 방언을 체험하는 방법 / 김동수 (사도나다나엘 /2009.12.03)
  • 작성자 : foreve...
  • 작성일 : 2016.07.12
  • 조회수 : 490
foreverthanks 2016.07.12 490
125 방언이란 무엇인가 ( Zenis/2009.12.01)
  • 작성자 : foreve...
  • 작성일 : 2016.07.12
  • 조회수 : 438
foreverthanks 2016.07.12 438
124 왜 방언을 해야 하나?- 케네스 해긴 [1] (Daniel /2009.05.09) 1
  • 작성자 : foreve...
  • 작성일 : 2016.07.12
  • 조회수 : 509
foreverthanks 2016.07.12 509
123 “하늘의 언어” vs “중지된 은사” [4] (나다나엘 /2009.05.06) 1
  • 작성자 : foreve...
  • 작성일 : 2016.07.12
  • 조회수 : 455
foreverthanks 2016.07.12 455
122 방언 역사에도 개입하는 귀신들-귀신의 세력을 쫓아내는 능력 [7] (사도 요한 /2008.12.29) 1
  • 작성자 : foreve...
  • 작성일 : 2016.07.12
  • 조회수 : 490
foreverthanks 2016.07.12 490
121 “하늘의 언어, 한국 교회 거룩함 회복 자양분” – 뉴스파워에서 [1] (나다나엘 /2008.12.06) 1
  • 작성자 : foreve...
  • 작성일 : 2016.07.12
  • 조회수 : 519
foreverthanks 2016.07.12 519
120 방언 은사의 활용 [3] (나다나엘 /2008.11.30) 1
  • 작성자 : foreve...
  • 작성일 : 2016.07.12
  • 조회수 : 446
foreverthanks 2016.07.12 446
119 방언… 그리고 그 다음은? – 김삼 [2] (나다나엘 /2008.11.15) 1
  • 작성자 : foreve...
  • 작성일 : 2016.07.12
  • 조회수 : 489
foreverthanks 2016.07.12 489